밸런타인데이였던 지난 14일, 초콜릿도 선물도
없이 그냥 지나쳤다. 매년 작은 초롤릿이나
초코케이크로 기념했던 것 같은데
해가 갈수록, 아니 나이를 먹을수록 이젠
우리처럼 노년을 향해가는 부부들에겐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기념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깨달음이 출근을 하려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왜 올 해는 초콜릿을 안 주냐고
그래서 젊은 층에는 의미 있는 날이겠지만
우리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아서라고 했더니
자기는 받아야겠단다.
[ 알았어. 무슨 맛 초콜릿으로 사줄까?
위스키가 들어있는 거? 아님 블랙 초코? ]
[ 아니, 그냥 나 밥 사 줘..]
초코에서 밥으로 왜 넘어갔는지 모르겠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밥을 사달라는
깨달음의 말투에 나도 모르게 알겠다고 했다.
4시에 조기 퇴근을 할 예정이니 내게 미리 예약을
해줬으면 한다는 말을 남기고 출근을 했다.
왜 초콜릿이 아닌 밥인지 묻지도 못한 채
뭐에 홀린 듯 나는 예약전화를 넣었다.
자리에 앉자 마치 미리 준비한 듯이 일사천리로
주문을 하고 니혼슈(日本酒)도 한 병 시키는 깨달음.
[ 깨달음, 내가 여기 예약할 거라 어떻게 알았어? ]
[ 여긴 코로나 대책이 잘 되어 있어서
당신이 안심할 수 있고 우리 둘이 다
좋아하는 메뉴니까 선택할 거라 생각했지 ]
[ 그것도 그렇지만 당신이 지난번에 간장게장 먹고
싶다고 해서 여기로 한 거야, 여긴 비록
간장게장을 팔진 않지만 ]
[ 간장게장은 한국에서 먹어야 돼, 여기서는
이걸로 충분해, 고마워 ]
니혼슈를 들고 건배를 하며 물었다.
[ 근데 왜 갑자기 밥 사달라고 했어? ]
[ 코로나 때문에 계속 외식도 못했잖아,
그래서 이렇게라도 나와 바람도 쐬고
오랜만에 외식도 하고 싶어서 ]
우린 게살을 발라 먹으며 밸런타인데이가
젊은 층들만이 즐기는 기념일이 되어가더라도
나이 든 사람들도 이런 날만큼은 그냥
젊은 분위기를 즐기며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얘길 나눴다.
[ 이런 날조차 없으면 심심하잖아 ]
[ 그건 그래...]
[ 더 나이 먹으면 점점 사는 게 재미없어질텐데
이런 날에 맞춰 즐기면 좋잖아 ]
[ 맞아,,]
스테이크 철판에 게를 굽던 깨달음이 간장게장을
일본 스타일이 아닌 오리저널 한국식으로
하는 가게가 없다며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 많이 먹어둘 걸 지금 와 생각해보니
후회스럽단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가 이렇게
길어질 줄 누가 알았겠고. 한국에 못 갈 거라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며 푸념 섞인 말을
털어놓는 깨달음이 게를 집어 먹었다.
간장게장을 딱 한 번 만들어 본 적이 있었다.
살아있는 꽃게를 어렵게 구해서 해봤는데
전문점만큼 맛있지 않고 뭔가 부족했었고
무엇보다 깨달음이 큰 꽃게가 아닌 여수 돌게처럼
작고 알이 꽉 찬 게장을 좋아해서인지
내가 만든 게장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 당신은 너무 많은 걸 먹어봐서 웬만한 건
맛없다고 하잖아 ]
[ 그건 인정해.. 어머님, 처형, 처제 집에서
먹은 음식들이 진짜 맛있잖아, 그리고 식당도
맨날 최고로 맛있는 곳만 데리고 가니까
내 입이 알아버린 거지. 그래서 맛없는 것은
용서를 못해 ]
[....................................... ]
입맛도 길들이기 나름이라고 하는데 깨달음은 내가
생각해볼 때, 한국에서 우리 가족들이 버릇을
잘 못 들인 게 분명하다.
[ 아,, 한국엔 언제나 갈 수 있을까....]
[ 다음 주 아빠 추도식에 형제들도 다 모이지
못하고 따로따로 할 거래 ]
[ 그래? ]
또다시 침묵이 흐르고 우린 게살을
발라 먹는데 집중했다.
[ 어머님 생신도 있지? ]
[ 응,,2월 말이야,,]
[ 선물이라도 보내드려야겠네..]
[ 엄마가 아무것도 필요없다셨어 ]
[ 그래도 보내드려야지, 아,,, 그 집 케이크
진짜 맛있는데.. 그 케이크 사서 생일 축하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그럴텐데..]
[..................................... ]
깨달음은 다시 작년 이맘때 아빠 기일에 맞춰
한국에 갔을 때 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서울까지 갔지만 광주에 내려가지 못하고
언니와 동생도 잠깐 얼굴만 보고 헤어졌던
작년 2월,,, 이젠 아예 가지를 못하고
이렇게 멀리서 기억들만 꺼내
그 시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 올 9월에도 못 갈까? ]
[ 깨달음,그냥 마음을 비워... 가면 가는 것이고
못 가면 못 가는 것이야,,]
[ 결혼식에 나도 가고 싶은데...]
조카 결혼식이 아닌, 더 큰일이 생겨도
지금으로서 우린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이렇게 가족 행사가 있는 달이 찾아오면
깨달음은 더 애타 하는 것 같다.
[ 깨달음, 우리는 우리대로 여기서 이렇게
당신이 말한 것처럼 밸런타인데이를
즐기며 지내는 거야,, 어쩔 수 없잖아,,]
[ 그러긴 하는데.. 매년 2월이면 가서 그런지
더 생각나네..]
이곳은 코로나 백신을 이번 주부터
의료관계자를 선두로 접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9월에도 왠지 하늘길이 자유롭게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깨달음 바람처럼 예전처럼 한국에 언제든지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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