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자존감을 살리는 물건
뭘 먹을까 고민하지 않고 바로
고깃집으로 향했다.
일본으로 돌아와 다시 주어진
하루하루를 충실히 잘 지낸 우리는
결혼기념일을 축하할 겸 겸사겸사
가게에 들어서기 전에 작은 케이크를
몇 개 샀다.
일단 주문을 하고 간단히 기록용 사진만
찍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촛불을 켜는데
점장님이 생일이냐면서
가게 안쪽에 조명을 모두 끄시고는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해 주시더니
축하박수까지 보내주셨다.
새 케이크는 점장님께 맛보시라고 전해드리고
우린 막걸리로 건배를 했다.
그리고 재빨리 고기를 구웠다.
이번에 한국에서 고기를 먹을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닌데 먹지 못하고
와서인지 굶주린 사자들처럼
구워지는 데로 아무말없이
빠르게 각자의 입으로 넣었다.
[ 깨달음, 이제 기념일 같은 거 그냥 생략하기로
하지 않았나,, 작년에도 이런 얘기했던 것 같은데 ]
[ 그러긴 하는데.. 그래도 그냥 하는 재미지..
그리고 매년 그날에 했던
약속들을 상기하는 것도 좋잖아,
그런 의미에서 하는 거지 ]
생일이나 기념일이라고 해서 서로에게
선물을 주는 것도 어느 때부터인지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냥 필요한 게 있으면 각자 그때 그때
알아서 구입을 했고 상대가 사줬으면
하는 게 생기면 선 구입 후 청구서를
내미는 아주 현실적이고 현명한
방법으로 살았다.
생일, 결혼기념일, 크리스마스 등등
포함시켜도 1년에 일주일도 채 되지 않으니
그냥 몰아서 여행을 떠나자고 합의를 보고
실제로 온천을 가거나
크루즈를 떠나기도 했다.
기념일들이 그렇게 정작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야들야들하게 구워진 족발을 뜯던
깨달음이 뭔가 떠올랐는지
올 크리스마스는 특별히
갖고 싶은 게 있다며 챙겨달라고 했다.
[ 알았어, 뭐든지 괜찮아, 크리스마스 때가
아니고 지금 필요하다면 지금 사줄게 ,
뭐야? 갖고 싶은 게? ]
날 잠시 응시하더니만은 약간 망설이는
눈빛을 보였다.
[ 왜 그래?, 말해 봐, 웬만한 건 다
들어줄 수 있어 ]
[ 자동번역기.. 100개국이 넘는 나라의 말을
바로 번역해 주는 기계야 ]
[ 아,,, 그게 필요해? ]
[ 응,, 나,,, 한국어 도저히 안 돼..
그래서 포기했어, 아니 포기라기보다는
그 기계의 힘을 빌리는 거지..]
[.............................. ]
나이 탓으로 돌리기는 뭐 하지만 원래부터
언어영역이 아주 약한 깨달음은 한국어를
매일 죽어라 외우고 공부를 해도
도무지 늘지 않아 고민을 하다가
그냥 현시대에 걸맞은 아이템을 찾게
되었고 이 기계가 있으면
삶이 훨씬 윤택해지지 않을까라는
결론을 내렸단다.
[ 대략 얼마야? ]
[ 내가 갖고 싶은 건 5만 엔 안 넘어,,]
[ 그래.. 알았어 ]
올봄, 깨달음은 나와 4개월간 한국어
특강을 강도 높게 했었다.
한글의 구조 및 문장을 만드는 모든 과정을
마쳤지만 깨달음에게 새로운 언어습득은
상당히 어려운 영역이었다.
가르치는 내 입장에서도 이렇게 학습이
늦은 학생은 처음이었고
정작 본인인 깨달음도 자신의 학습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있다는 걸
절실히 느꼈던 4개월이었다.
그만하자는 말은 누가 먼저 꺼내지 않았지만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그렇게
특강은 끝이 났다.
[ 내가 새벽에도 하고, 회사에서도
틈나면 단어 외우고 나름 했는데..
도무지 안 외워지고,, 이번에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빨리 말하면
전혀 안 들렸어..,,,]
자괴감이 들 정도로 자신이 싫었다는
깨달음, 다 배운 단어, 외운 단어인데도
하나도 못 알아듣고 내게 100%
의존했다면서 앞으로 어떻게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을 했단다.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은 안 되는
제2외국어를 붙들고 공부하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더 이상 버리고 그냥
최신 번역기기로 편하게, 그리고
자신 있게 살고 싶다는 깨달음.
마지막으로 주문한 갈비국밥을 들이켜면서
자기 속마음을 털어놔서 시원하다고 했다.
[ 잘했어. 안 되는 건 억지로 못하니까 ]
여러모로 극복하기 힘든 영역은
어찌 보면 기계에 의존하는 게
깨달음에겐 훨씬 능률적이고 현명한
길잡이가 되어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번주에 가자, 매장에 ]
[ 그래? 고마워!! ]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하니 신문물을
통해서라도 자존감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면 바로 사 줘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