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망했을지 몰라도
옛 동료를 만났다. 동료이면서 동기인
그녀는 여전히 차분했다.
정기적이진 않지만 가끔씩 메일로
서로의 안부와 생사를 물어와서인지
3년 만의 만남인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술을 썩 즐기지 않은 그녀가 오늘은
이자카야에서 보자고 하는 건
뭔가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코로나 얘기를 시작으로 요즘 가장 핫한
월드컵 얘기까지 두서없는 대화가 오갔다.
[ 정 상, 한국 다녀왔어? ]
[ 응, 코로나로 못 가다가 10월에 다녀왔어 ]
[ 그랬구나, 아,,남편분도 잘 계시지? ]
[ 응, 잘 있어 ]
그녀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잠시 소개를 하고는 동기들 소식 전했다.
협회지를 보고 이미 다 알고 있는
동기들 근황을 난 굳이 듣고 싶지 않았다.
누가 교수가 되고 누가 어디로 전직을 했는지
나와 상관없다 싶어 다른 화제를 꺼냈다.
[ 호소키(細木) 상은 재혼 안 해? ]
[ 재혼?,,그런 건 두 번 다시 안 할 거야.
그리고 정 상이 결혼 같은 건 하는 게 아니라고
나한테 맨날 설교했잖아,,]
[ 아,,그랬지. 그냥 애인만 만들어서 살아,
그게 딱 좋아 ]
[ 나도 그렇게 생각해 ]
호소키 상은 빠르면 내년쯤 미국으로
이민을 갈까 생각중이라고 했다.
나이 50이 넘도록 시간강사만 하고 있는 것도
지긋지긋해서 다 때려치고 미국에서 살까 싶단다.
[ 난, 걸릴 게 하나도 없어. 미혼에다가
그동안 모아둔 돈도 있고 하니까
그냥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일본어 선생님
같은 알바나 보란티어를 하며 남은 여생을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 나쁘진 않네..]
반백년을 살아보니까 더 늙기 전에 넓은 세상에
나가 영혼이 시키는대로 살아보는 것도
이번 생에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지금은 일본어교육능력시험
공부를 하고 있단다.
[ 완전 계획을 다 세웠네 ]
[ 응, 어느정도는,,,]
[ 근데.. 영혼이 시키는 대로라는 게 뭐야? ]
[ 음,, 뭔가 자연인처럼 마음이 시키고
몸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다고나 할까..]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좀 더 자유롭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뭔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을 깨고 다시 제2의 인생 같은 걸 살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일었단다.
[ 무슨 계기가 있었어? ]
[ 계기라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이
싫증 났자고나 할까..]
계기가 없다고 그녀는 말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나와 그녀는 같은 길을 걸어왔고
좌절이라기보다는 포기를 택하면서
자신과 타협하는 그 시점이 왔다는 것이다.
[ 정 상은 한국 안 돌아 가? ]
[ 음,, 아마 2년 후에나 갈 것 같아 ]
[ 완전히 돌아가는 거야? ]
[ 완전히는 힘들고,, 왜냐면 남편이 있잖아,
이혼을 하면 모를까,,]
[ 그럼 왔다 갔다 할 거야? ]
[ 그러겠지. 근데 한쪽으로 정리를 할 생각이야.
그래서 남편이 한국어 배우고 있어 ]
[ 그래? 그럼 깨달음 씨가 한국생활을 하게 되네 ]
[ 그렇게 되겠지..]
그녀는 이번 생의 마지막은 미국이 될 거라며
그전에 한국에도 한 번 가 보고 싶다고 하면서
내게 이번 생에 하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 나,,, 이번 생은 망했으니까,, 그냥
세계일주나 하면서 늙어갈 생각이야 ]
[ 그것도 멋있다. 근데 왜 망한 거야? ]
[ 그냥,, 이번 생은 재미없는 게 많았으니까...]
[ 뭐가 그렇게 재미없었는데? ]
[ 모든 게 다...]
자꾸만 파고드는 그녀의 질문이 당혹스럽긴
했지만 두리뭉실하게 넘어갔다.
[ 나도 그래서 미국으로 간다는 거 아니야.
남은 노후는 좀 멋지고 여유롭게
보내고 싶어서 ]
점원이 2시간제가 곧 끝난다며 라스트 오더를
하라고 메뉴판을 가져오길래 우린 계산을 하고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남은 얘길 나눴다.
대충 언제쯤 미국에 갈 것 같냐고 물었더니
일본어 교육 자격증도 따고
영어도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며
미국에 이모님이 살고 계시기에 심리적인
부담이 덜하다며 마음을 굳히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단다.
[ 근데, 정 상,, 언제부터 커피 마셨어?
원래 안 마시지 않았어? ]
[ 응,, 카페인 때문에 안 마셨는데
그냥 마시기로 했어,, 나도 호소키 상처럼
내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이나 고정관념
같은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우린 나이 50이 되고서야 인간이
변하기 시작한다며 크게 웃다가
이번 생은 망했는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은
그냥 느슨하게 풀어놓고 자유롭게 살자며
우린 커피로 건배를 했다.
꿈을 접은 채 자유라는 타이틀을 걸고
떠나려는 건 새로운 자신을 찾고 싶다는
마지막 절규 같아서 코 끝이 찡해왔다.
그녀가 나 같고 내가 그녀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