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정리하던 날.
주문한 물이 오고 나서 한 시간 후
화장지와 각종세제가 도착했다.
티브이에서는 아침부터 연말 대청소를
어떻게 하면 쉽고 간편하게 할 수 있는지
그 노하우를 알려준다며 청소업체
프로들이 나와 청소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남들이 하듯이 연중행사처럼 해왔던
나는 올해 대청소를 하지 않을 생각이다.
2주 전부터 조금씩 해둔 덕분에 굳이
대청소라고 할 게 없었고 오늘은 그 외에
할 일들이 많았다.
일본인 친구들에게 연말선물로 보낼
김치를 버무리고 깍두기와 창난젓,
그리고 아이가 있는 집에는
오징어채도 달달하게 볶았다.
집에 챙겨두었던 아이스박스에 야무지게
묶어 챙겨 넣은 뒤, 자전거 앞 뒤에 싣고
우체국으로 달렸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다 깨달음에게
카톡이 왔길래 지금 우체국이라고
사진을 보냈더니 자기 거래처에도
한 사람 보내줬으면 좋겠다길래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바로 보내왔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김치를 박스에
담아두고 다음은 수조 속 열대어를 정리했다.
이번에는 치어들 뿐만 아니라 어미까지
모두 아쿠아센터에 보낼 생각으로
한 마리씩 건져냈다.
집을 나와 다시 우체국에 들러 깨달음
거래처에 김치를 보내고 난 전철을 타고
아쿠아센터로 갔다.
연말이라 거리는 새해맞이 장식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덜컹거리는 전철 창을 타고 따스한 햇살이
내 뒷목을 감싸 안았다. 문득, 이렇게
포근한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실감 같은 게 느껴졌다.
핸드폰에선 이선균 씨 죽음에 관한 내용이
제목만 바뀐 채 또 뜨고 또 떴다.
아쿠아센터에서 얼른 치어들을 주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점장이 말을 걸어와
얘기를 하다가 새 식구들을 몇 마리 또 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하고 나와
나는 다시 전철을 탔다.
하나네 공항까지 가야 해서
책을 꺼내 펼쳤는데 솔직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 약속장소에 서 있는데
1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늘 늦으신 분이니 그러러니 하고기다렸다.
정확히 17분쯤 지나서 오시더니 전철이
도중에 멈춰서 늦은 거라며 미안하다고
얼른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일 관계로 알게 된 사토미(里美) 상은
전남편이 재일동포였던 이유로
한국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었고
아는 만큼 궁금한 것도 많은 분이다.
오늘은 연말에 처리해야 할 일을 할 겸
겸사겸사 나랑 단 둘이지만 올 해를
마무리하는 식사를 함께 하고 싶었다고 한다.
[ 내년에는 정말 정 상 못 만나는 거야? ]
[ 아니에요. 이렇게 만나면 되죠 ]
[ 그러긴 하는데... 그래도 ]
우린 식사를 하며 올해 협회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 사고 얘기를 했다.
보란티어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내 말에
크게 동감하던 사토미 상이 나를
자기가 아는 협회에 소개하고 싶다고
하길래 그냥 정중히 사양했다.
[ 왜? 정 상이하면 잘할 것 같은데 ]
[ 아니요,, 그냥 쉬고 싶어서요,,]
[ 정말 진심으로 쉬고 싶었나 보네..]
[ 네..]
[ 다들 정 상이 다시 와주길 바라던데 ]
[ 아니에요..저는 그만하면 충분해요 ]
식사를 마치고 커피숍으로 옮겨가서는
35살이 넘도록 빈둥거리는
자신의 아들 얘길 꺼냈다.
전남편이 태권도 학원을 보내서 운동을
꽤나 잘하는데 변변한 직장도 없이 알바만
하고 산다며 한국어도 어느 정도 하니까
한국에 가서 일을 찾은 건 어떠냐고 말을 해도
도통 듣지를 않는다며 그 아들만 없으면
자신의 노후가 더 편해질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커피숍을 나와 헤어지는 길에
사토미 상은 내게 작은 선물을 하나 주셨다.
지금까지 함께 일 할 수 있어 고맙다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멍하니
차창 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사토미상을 만남으로써 2023년도
내 할 일은 모두 마무리가 됐구나..
이제 협회와도 완전히 정리가 됐네..
그동안 수고했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