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날, 남편이 털어놓은 고백
마지막 기항지는 나가사키(長崎)였다.
나가사키는 여행으로 세 번이나 왔던 터라
하선을 할까말까 망설이다 일단 안 내리는 걸로
하고 아침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거의 잠들 때까지 먹고 마시고를 반복하는
크루즈생활은 장점이며 단점이다.
운동기구에 따라 두 군데로 나눠진
스포츠짐은 유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는
서양인과 동양인 두 그룹으로
나눠져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매일 아침과 저녁은 코스로 정찬을 먹고
뷔페는 거의 24시간 풀가동이 되어
언제든지 골라 먹을 수 있고
수영장에는 피자와 햄버거가 냄새로
식욕을 자극하고 오후엔 티타임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달달한 디저트와
음료, 아이스크림들이 유혹한다.
그러다 보니 입이 한시도 쉴 틈이 없고
우린 특히 가는 곳마다 술을 마시다 보니
안주거리를 다운받은 어플로 주문을 하면
우리가 있는 곳까지 바로 배달이 되니까
미동도 하지 않은채 손만 까딱거리는 생활이
반복되니 살이 찔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한참을 달리고 사우나에서 땀을 뺐어도
뭔가 부족한 듯해 바로 수영장으로
옮겨 가 또 열심히 몸을 괴롭혔다.
그렇게 오후 1시가 넘을 때까지 혹사를
시키고 나왔는데 깨달음이 사우나에서
너무 땀을 뺀 것 같다며 염분과 당분섭취를
위해 라멘과 쿠키를 먹으면서
맥주를 한잔 하자고 했다
[ 살 빼고 맥주 마시면 또 살쪄 ]
[ 그러긴 하는데 살 뺐으니까 마셔도 돼 ]
[ 그래 ]
내가 주문을 하려는데 깨달음이 갑자기
5시에 생일파티 예약했으니까
뱃속을 비워두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주문을 말렸다.
방에 들어와 지쳐 쓰러져 낮잠을 잔 뒤
예약시간 5시에 맞춰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더니 종업원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
생일 케이크는 디저트 나올 시간에
맞춰 내겠다며 축하인사를 해주었다.
[ 음력 생일은 언제지? ]
[ 올해는 11월 6일 ]
[ 난 매년 헷갈려 ]
[ 그냥 편한대로 해. 날짜가 뭐가 중요하겠어,
의미가 중요하지 ]
[ 맞아, 오늘도 이렇게 축하할 수 있어서,
그것도 당신이 좋아하는 크루즈에서
한다는 게 얼마나 좋아 ]
[ 그래, 당신 덕분이야, 깨달음, 고마워 ]
[ 내일은 다시 집으로 가네..]
[ 응,,, 가긴 싫지만 가야지..]
음식들은 기대했던 것만큼 맛이 좋았고
깨달음도 아주 흡족해했다.
[ 근데.. 올해 당신이 몇 살이야?]
[ 몇 살인지 몰라?]
[ 음,,50 하고 몇이지? ]
[ 그냥 50이라 생각해..]
내 나이가 60이 되면 크루즈로 세계 여행을
가보자며 너슬레를 떠는 깨달음은
내 나이가 정말 몇인지 모르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래도 난 말해주지 않았다.
날 처음 봤을 때 30대 중반이었던
그 모습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며
밤색 정장을 입고 있었단다.
네 번째 데이트하던 날, 신주쿠에서
스티커사진 찍은 걸 지금도
자기 지갑에 넣어놓고 다닌다며
알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솔직히 말하면 사진 찍은 것도 기억하고
내 수첩 안쪽에 붙여두었던 그 사진을
헤어지려고 마음 먹었던 날,
뜯어버렸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 깨달음,, 그 사진 가끔 봐? 보면 어때? ]
[ 그 땐 완전 아가씨였지. 그리고 당신
사진발이 좋잖아, 정말 이쁘게 나왔어 ]
[............................ ]
그 사진을 왜 보는지, 언제 보는지 다시 물었다.
[ 아주 가끔 보는데. 당신이랑 싸웠을 때나
당신이 날 속상하게 할 때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착하고 순했던 여자가 왜
변했을까 싶어서,. 마음의 위로를 받고
싶을 때 사진을 봐.. ]
[ 위로가 돼? ]
[ 위로가 돼, 그 순했던 당신을 떠올리면
아,, 원래는 이렇게 착한 사람이였음을
상기시키고 잊고 있었던 당신의
좋은 점들을 떠올리지..]
좋은 기억들, 행복했던 시간들을
끄집어내서 상처받은 마음을
스스로 쓸어 넘기며 어루만진단다.
그러면서 고백할 게 있다며 나와 사귈 땐
정말 여성스러움이 많고 고분고분한 성격을
가진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까 자기 생각과 달라 꽤나 놀랐단다.
[ 당신이 나를 당신 회사 직원한테 하듯이
하니까 그것 때문에 많이 싸웠지 ]
[ 그랬지.. 내가 버릇이 되다 보니까....]
깨달음은 20대에 회사를 설립,
경영자로의 입장에만 있어서인지 마치
상사가 직원에게 대하 듯 상하관계로
대하려는 경향이 있고 사무적일 때가
상당히 많았다.
[ 난 당신이 이렇게까지 고지식할지 몰랐어.
사귈 때는,, 참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상당히
가부장적인걸 나도 결혼하고 알았지..]
자기가 그렇게 고지식했냐며 아마
장남이어서 그랬을 거란다.
최근에 그 스티커 사진을 언제 봤냐고
물어보려는데 마침 생일 케이크와 함께
레스토랑 직원들이 빙 둘러 서서
생일축하송을 큰 소리로 불러주었다.
[ 깨달음,, 최근엔 언제 그 사진 봤어,.]
[ 안 본 지 오래됐는데... 한 5년, 6쯤 됐나.
위로받을 만큼 큰 다툼이 없었다는 거지,아무튼,
우리가 중년을 넘어 노년을 향해 가고 있으니까
지금처럼 잔잔하게, 평화롭게 살아갑시다 ]
[ 그럽시다 ]
깨달음은 다시 한번 내 생일을
축하해 주며 샴페인을 또 주문했다.
서로 사귈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결혼을 하는 순간, 마법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들을 둘이서 받아들이기까지 아파했다가
치유되기도 하고 또 상처받기도 하고,
상처 주기도 하며 어루만지고, 위로하길
반복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가부장적인 남자와 고분고분하지 않은
여자가 만났으니..
그런 인내와 아픔의 통과의례가 지나가면
노하우가 조금씩 생기면서 부부라는 관계를
지속시키기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게 된다.
지금처럼 평화로운? 결혼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깨달음이 다시 그
스티커 사진을 보며 위로받는 날이
발생하지 않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