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배려문화는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 물을 한 잔 하러
주방에 갔는데 싱크대 옆에 흰 종이가
놓여있었다.
아침을 수제비로 부탁한다는 메모였다.
한번 훑어보고는 물컵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예전 같으면 일요일 아침도 일찍
일어났을텐데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근 3년간, 우린 온라인 예배를 하고 있어
주말은 늦게까지 뒹굴뒹굴한다.
언제나 교회에 갈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깨달음이 적어둔
메모가 떠오른다.
아침부터 무슨 밀가루인가 싶어
다시 눈을 감고 뒤척이다가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늘 먹었던 누룽지로 조식을 차렸다.
깨달음이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 왜 갑자기 수제비야?]
[ 그냥,, 수제비가 먹고 싶어서 ]
[ 수제비를 어떻게 만드는지는 알지? ]
[ 몰라..]
[ 아무튼, 아침부터 밀가루는 안돼]
[ 수제비가 만들기 어려워?]
알기 쉽게 검색해서 이미지를
보여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만들기는 간단해, 근데 아까 말한 것처럼
아침부터 난 밀가루를 먹고 싶지 않아서
안 만든 거야, 당신도 되도록이면
밀가루보다 누룽지가 나을 것 같아서 ]
[ 나 누룽지도 좋아해.. 근데 지난번에
삼청동 수제비 얘기가 나와서인지
먹고 싶더라고 ]
[ 그렇게 먹고 싶으면 오후에 해줄게]
[ 아니야,, 괜찮아 ]
깨달음은 주말만큼이라도 나를 위해
자기 스스로 아침을 챙겨 먹겠다고
했던 걸 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
약속했던 거 잊였냐고 했더니 기억한단다.
[ 그런데도 수제비 해달라고 했어?]
[ 내가 수제비를 못하니까 ]
[ 지금 하고 못하고를 얘기하는 게
아니잖아, 당신이 주말은 차려 먹겠다고
했다는 걸 생각해 봐 ]
자기가 잘못했다 싶으면
바로 사과를 하는 깨달음인데
오늘은 좀 망설이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나 생각하는지
누룽지 그릇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온라인 예배를 보고 나서 난 잠깐 외출을
했다가 오후에서야 들어왔다.
깨달음은 자기 방에 있다가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거실로 나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 아니야, 미안할 것까진 아닌데
좀 당황했다고나 할까.. 그랬어 ]
[ 아니야 미안해 ]
자기가 혼자서 많은 생각을 해 봤는데
나이를 먹어서인지 점점 이기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이 변해가는 것 같았다며
배려가 부족했음을 사과하겠다고 했다.
결혼하고 10년이 넘도록 난 아침상을 차렸다.
일본인 부부 60프로가 조식을 빵으로
한다는데 우린 한국 백반 스타일로 쉬는 날도
별 반 다르지 않게 아침을 준비했고
그게 귀찮거나 싫지 않았다.
지금껏 깨달음이 배려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난 원래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아침이든, 저녁이든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 준비를 해 왔는데 오늘 수제비를
부탁한다는 메모는 여러모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다.
깨달음은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하는 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리고 자기가 주말에는 알아서 먹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못 지킨 것도 함께..
먹고 싶다고 말하면 뭐든지 내가 바로
만들어줘서 그걸 감사하지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반성한단다.
깨달음에게 은근히 가부장적인 면이
있다는 걸 결혼하고 바로 알게 됐지만
남자들은 다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요리하는 걸
좋아하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아마도 이번 코로나로 3년간
더 가까이 지켜보면서 조금씩 이기적인 면이
짙어져가고 있는 걸 느꼈던 게 아닌가 싶다.
수제비는 나에게 아주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인 건 분명한데 난 해주지 않았다.
주말에는 자신이 챙기겠다는 약속을
어겼고, 매일 이런 밥상을 받는 게
당연시되고 그러다 보니 아침부터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난 즐겁지 않았다.
아마도 작년, 내가 골절상과 대상포진이
한꺼번에 왔을 때 깨달음은 환자인 나를 위한
배려가 별로 없었던 기억이 응어리처럼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결혼 초, 내가 항암치료 중일 때도
깨달음은 내가 차린 밥상을 기다렸었다.
내가 아파서 요리를 할 수 없는 탓에 자신이
맛있는 걸 못 먹는다는 말을 했을 때
깨달음의 다른 모습을 본 것같아
꽤나 낯설었다.
그런 사람이란 걸 알고 있어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내 기분이
깨달음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수제비를 계기로 우린 서로가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개선해 갈 부분과
어떻게 배려를 해야 하는지,
손익을 따지지 않는 배려는 어떤 것인지,
진정한 배려라는 게 무엇인지
각자가 이해해야 할 것들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20년 넘게 이곳에서 살면서 일본인의 배려가
어떤 형태로 베풀어지는지 잘 알고
있는데 부부지간에도 그런 계산적인
배경이 깔려서는 안 되지 않겠냐는
내 생각을 전달했다.
이곳은 모르는 사람들끼리 행해지는
사회적 배려는 참 잘 되어 있다.
그 배려는 집단생활에 꼭 필요한 규칙이며
기본 매너에 속하기 때문에 배려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 모두가 지켜야하는
질서처럼 자리잡혀 있다.
하지만, 가까운 관계에 있을수록 이기적이고
자기가 우선이 되는 비배려문화 역시도
상당히 팽배해서 난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도 더더욱 부부관계에서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부부들이 그러겠지만 특히나
국제커플은 살아도 살아도
서로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맞춰나가야할 게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