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병원에 도착해서 차분히
책을 펼쳤다. 예약시간보다 30분 빨리
와서 독서를 하는 게 이젠 습관이 되어버렸다.
마음을 비우는 게 쉽지 않아서 그냥 책에
열중하며 내 이름이 불러질 때까지 기다린다.
간호사가 날 보고 멈찟 하더니 목례를 했고
다시 책을 펼치는데 바로 내 이름이 들려왔다.
[ 왜 일찍 오셨어요? ]
[ 네..그냥,,,]
[ 일찍 오셨다고해서 바로 알려드릴려고,,]
[ 감사합니다 ]
[ 결과가 나왔는데,,좋습니다.
인유두종 바이러스(HPV) 감염이 없었어요.
지난번 저쪽 병원에서 했던 검사에서는
이상이 발견됐는데 재검사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
[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앞으로 조심해야할 게
있는지..뭐 그런게 있으면 알려주세요.]
[ 특별히 할 것은 없어요, 문제가 없으니까
정기적으로 검사만하시면 될 것 같아요 ]
인유두종 바이러스(HPV)는 여성에게 많은 질환으로
간단히 말하면 인체의 표피를 감염시키는
100종류의 바이러스의 하나로 저절로
치유되기도 하지만 세포변이가 생겨
고위험군에 들어갈 경우에는
자궁경부암을 유발하기도 한다.
경쾌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오는데
깨달음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 깨달음, 시간 내기 어렵다면서 왔어? ]
[ 왜 병원에서 나오는 거야? 결과는 뭐래?]
[ 응, 이상없다고 그랬어..]
[ 그럼 저번 검사결과는 뭐야, 잘못 된거야? ]
[ 몰라,,아무튼 아무 문제 없으니까 정기검사만
받으면 된다고 그랬어 ]
[ 그래? 그럼, 술 한잔 하러 갈까? ]
우린 가까운 일식집에 들어갔다.
오후 3시를 넘긴 이른 시간이데
카운터석에 다른 손님들이 꽤 있었다.
일본에서는 대낮부터 술을 판매하는 곳이
의외로 많고 이 시간대에 술 마시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기에 나도
낮술문화가 익숙해졌다.
따끈한 오유와리(소주에 뜨거운 물을 섞은 술)로
건배를 하고 서로 메뉴판을 보며
뭘 먹을지 고르느라 침묵이 흘렀다.
[ 깨달음, 사시미 주문해서 먹지? ]
[ 아니, 괜찮아 ]
내가 사시미를 거의 못 먹기 때문에
깨달음은 나와 있을 때 회를 주문하지 않는다.
내 친구들은 20년 가까이 일본에 살면서
회를 못 먹는다며 안타까워했지만
난 날생선이 몸에 맞지 않는지 먹고 나면
꼭 탈이 났었다. 그래도 초밥은 이제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지만 처음엔 초밥도 거의 먹질 못했다.
아무일 없어서 다행이라며 숨을 크게 한번
몰아쉬는 깨달음이 피곤해 보였다.
[ 깨달음,,,내 걱정 많이 했어? ]
[ 응,,이번에도 또 좀 심각하면 정말
한국으로 귀국을 해야하는 건가 생각했어...
자꾸만 여기저기 고장이 나는 건 연령에 따른
노화현상이겠지만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
[ 스트레스 측정하러 한 번 가볼까 해.]
[ 그래, 한번 다녀와 봐,,]
이렇게 병원을 다녀오고 새로운 질병이 발견될 때면
우린 항상 문제점이 무엇일까 둘이서
머리를 맞대로 분석을 해보기도 하고 이유를
알아내려고 애를 쓴다.
두번째 술을 주문하고 깨달음이 갑자기 뭐가
스트레스인지 솔직히 말해보라며 진지한
눈으로 날 똑바로 쳐다봤다.
스트레스가 뭐가 있을까...
하나씩 나열하지 않아도 금방 내 머릿속을
스치는 원인이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서울의 아파트가
언제 완공이냐고 다시 물었다.
[ 2020년 도쿄 올림픽 때 입주할 수 있어 ]
[ 2020년이면 곧이네.당신은 되돌아 가고 싶어?]
[ 꼭 귀국을 해야겠다는 건 없는데
이렇게 몸이 말썽을 부리면 그냥 이곳에서의
모든 생활을 접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야.... ]
모든 걸 접는다는 내 표현이 뜻밖이였는지
깨달음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꼭 일본에서만 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이곳에서 평생 살고 싶은 생각도
처음부터 없었다. 길었던 공부를 마치고
자리가 잡히면 독신생활을 즐기려 했는데 바로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이렇게
18년이라는 시간을 머물게 된 것같다.
[ 깨달음, 당신은 나 없이도 음식도 혼자 잘 해먹고
전혀 아내의 필요성을 못느끼고 살잖아,,,
그래서 예전부터 우린 주말부부라던가
한달부부가 맞다고 그랬던 거야...
한번쯤 생각해 봤어? 정말 내가 한국에 먼저
가거나 따로 살게 된다면 어떻게 할건지..]
http://keijapan.tistory.com/1118
(남편이 차린 밥상에 배신감이 든 이유)
[ 한국에서 혼자 살고 싶어? ]
[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당신은 일을 아직도
10년이상 할 거잖아, 그 안에 무슨일이 있으면
나 혼자라도 귀국을 해야되지 않을까해서 ]
[ 그래..당신이 그게 좋다면 그렇게 해..]
부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깨달음에게 변화가 온 듯했다.
[ 왜 생각을 바꿨어? 부부는 같이 살아야 한다며?]
같이 살고 안 살고가 중요한 게 아닌
내가 스트레스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 선택에 따르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내 건강을 위해서는 100%
모든 선택권을 넘긴다고 말하는 깨달음이
고마워서 안주를 하나 입에 넣어줬다.
그랬더니 바로 자기도 일 그만하고 한국에서
놀고 싶은데 어떡하냐고 눈을 깜빡깜빡하며
장난끼 가득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 먹을 것도 많고, 갈 곳도 많이 있는데
나는 언제 가지? 당신 혼자서 한국에 살게 되면
한달에 한번씩 가서 실껏 놀고 오면 되겠다,
이번 여름 제주도 한달살기때처럼, 그치? ]
아직 2년후에 일이고 확정된 것도 아니며
만약의 상황을 얘기했을 뿐인데
깨달음은 바로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정말 2년후 어떤 선택을 할까,,
한치앞도 모르는 세상인데 2년후를 어떻게
엿볼수 있겠냐만은 되도록이면 깨달음과 같이
한국생활이 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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