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났더니 내 노트북 앞에 지폐가 3장 놓여있다.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데 샤워를 하고 나온 깨달음이 날 힐끗 쳐다본다.
무언가 할 말이 있을 때 나오는 깨달음만의 버릇이다.
어젯밤 몇 시에 들어왔냐고 물었더니 아무 대답없이 출근준비를 한다.
이곳은 벌써부터 송연회가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깨달음 퇴근시간도 점점 늦여지고 있었다.
이 지폐 3장은 깨달음이 낸 벌금이다.
결혼 초, 우린 국제커플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둘만의 약속같은 걸 만들었다.
같이 살면서 서로 불편했던 사항들을 거침없이 털어 놓았고,
서로 싫었던 부분까지도 빠짐없이 얘길 했었다. 그렇게 만든 11가지의 약속,,,,,
1. 같은 얘길 두 번 반복시키지 말기.
2. 건강을 위해 술은 하루에 5잔까지만 마시기.
3. 오해가 생겼을 시, 충분한 대화와 어떤 경우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기.
4. 부부싸움 후에도 출퇴근시는 웃는 얼굴로 인사하기.
5. 애정표현은 아낌없이 하기.
6.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의 편에 서주기.
7. 주의사항은 1일 3회이상 반복하지 않기
8. 부정적이고 마이너스 대화는 하지 않기.
9, 서로의 나라와 문화를 부정하거나 비교하지 않기.
10 상대방의 가치관을 소중히 생각하기.
11.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서로 협력하기.
이렇게 계약서처럼 서로 적은 약속카드에 이름과 도장까지 찍어 지갑속에 넣고 다닌다.
그리고 또 다른 약속은 귀가시간에 관한 벌금제도였다.
1. 연락이 없는 경우: 11시가 넘은 귀가시 벌금 1만엔 ( 시간당 1만엔씩 추가)
2. 연락이 있을 경우: 12시까지 오케이, 단 자정을 넘길시 시간당 무조건 1만엔.
서로의 동의하에 벌금액도 정했고 이 역시도 서로 도장을 찍어 잘 보관해 두었다.
이 외에도 바람을 필 경우 등등 좀 리얼한 내용들이 많았기에
코팅을 해서 가져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벌금제도에 깨달음이 요즘 불만이 생긴 듯 싶었다.
시원하게 홍합국을 끓어 아침을 준비할 때까지 아무말 없던 깨달음이
식탁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어제 집에 도착한 시간이 1시 14분이였는데
벌금을 고스란히 만엔 낼려고 하니 억울하다고 30분에 5천엔으로 바꿨으면 한단다.
[ ........................... ]
술마시다 보면 늦게 된다고,,, 결혼 후에 거래처 사장들이 이른 귀가를 하는
자기한테 변했다고 은근 놀린단다.
결혼 전에 얼마나 당신이 늦게까지 놀고 돌아다녔으면 사람들이 그러겠냐고
이젠 당신 나이도 있으니까 적당히 놀아라고 그랬더니
노는게 아니라 거래처와의 관계는 시간 정해놓고 술마시기가 어렵단다.
가라오케에서 노래 몇 곡 부르면 금방 12시 되고, 1시 된단다.
[ ........................... ]
실은 나도 작년에 5만엔을 낸 적이 있어 깨달음이 뭘 얘기하고 싶은지 알고 있기에
알았다고, 그럼 30분에 5천엔씩 하는데
그 대신 연락을 꼬박꼬박해주고 술도 적당히 마셨으면 한다고 그랬더니 꼭 그렇게 하겠단다.
지난 주에는 12시 되기 전에 숨을 헐떡거리고 뛰어 온 적이 있었던 깨달음.
약속을 지키려는 깨달음의 모습이 고마웠고 괜히 미안했었다.
이제 결혼생활 4년밖에 지나지 않은 우리부부,,,
우리가 했던 약속카드를 가끔 읽어봐도 아직까지 지켜지지 못하고, 잊고 있었던 약속들이 많다.
서로 다른 인격체가 만나 살다보니 싸우고, 부딪히고, 짜증내고, 화내고,,,
저 약속들을 까맣게 잊고 다툴 때도 많았던 게 사실이다.
같은 나라 사람들도 부부로 살아가는 게 힘들다는데
자라 온 나라도 문화도 환경도 다른 남녀가 만나 공동생활을 하다보니
생각지도 못한 문화의 차이를 느낄 때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많은 대화가 필요했었고, 굳이 말이 필요없을 때도 있었다.
내가 피곤한 만큼, 상대도 피곤할 거라 상상 할 수 있었기에.......
상대를 이해하기 보다는 먼저 상대의 나라와 문화, 습관들을 편견없이 받아들이는 게
트러블을 줄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배우자가 외국인이여서 쉬운 점도 있고, 어려운 점도 있고,,,
앞으로도 서로 맞춰가야할 정서, 서로 보듬어야할 문화들이 생길 것이다.
우린 한일커플이기에 또 다른 색깔의 문제들을 안고 있지만
세계 각국의 국제커플들도 나름 갈등과 이해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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