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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신랑(깨달음)

남편 가슴에 슬픔이 묻어나던 날

by 일본의 케이 2019.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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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처와 약속이 있어 저녁을 먹고 온

깨달음에게서 술냄새가 났다.

 많이 마셨냐고 물었더니 소주 세 잔정도

했다면서 자기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한 시간쯤지나 다시 깨달음 방에 들어가봤더니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 또 출장 가는 거야? ]

[ 응 ]

[ 1박하는 거야? ]

[ 응 ]

[ 어디? ]

[ 나고야...현장 둘러보고 시골에 내려가서

하룻밤 잘 생각이야 ]

[ 어머니한테 가 보려고? ]

[ 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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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국에 가기 2주전, 서방님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시어머니가 지난 1월,

 요양원 화장실에서 넘어져 왼쪽 고관절수술을

하시고 재활치료를 하던 중에 또 넘어져 이번에는

오른쪽 고관절수술을 하셨다는 것이였다.

그 통화를 하면서 깨달음은 처음으로 어머님의

부주의와 병원에서 어떻게 관리했길래

 또 수술을 하게 만드냐며 화를 냈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깨달음과 조금 긴 통화를 하며

위로라기보다는 괜시리 어머님 만나서 화내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나도 같이 가고 싶었지만 스케쥴이 맞지 않아

갈 수 없어 미안한 생각들이 깊어갔던 오후,,

오전에는 미팅이 있고 오후 늦게서야 시골에

갈 수 있다던 깨달음에게서 시골행 버스에 

탔다며 카톡이 왔다.

 서방님에게서 온 메일을 얘기하면서 어머님이

 치매증상이 심해져 아버님이 돌아가신 걸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괜찮을 거라고 만나서 차분히 얘기해 드리면

 다시 기억하실거라고 했더니 자기도

 그러길 바란다고 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바로 어머니 사진을 보내 온

깨달음..촛점이 많이 흐려진 어머니 눈빛이

슬프디 슬프다. 아들인 깨달음을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애처롭게 쳐다보고 계셨다. 

[ 대화는 별 문제 없어? ]

[ 응 , 이렇게 만나면 아무렇지 않은데,,

아버님 얘기하니까 또 금방 요양원에서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는데 혼자 있으니까

정신이 오락가락 착각을 하신 가 봐 ]

[ 그래,, 어머님 좀 바꿔 줘 ]

 어머님께 함께 가질 못해서 죄송하다고 몇 번

말씀 드리고 곧 시간내서 찾아뵙겠다는 약속도 하자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민폐 끼쳐서 미안하다고

마음만으로 충분히 고맙다고 하신다.

 통화를 마치고 깨달음은 서둘러 마트에 

가서 간식거리를 사들고 아버님이 계시는

요양원으로 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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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아버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간 듯한 

중화요리집에서 메시지 없이 술과 함께 

음식 사진만 몇 장 보내왔다.

 

그리고 다음날 일찍 어제와 같은 코스로

병원과 요양원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집에 잠시 들러봤는데 시댁 바로 옆 건물들이

모두 허물어져 없어지고 빈 공터가 되어서

비가 주방쪽으로 흘러들어와 있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버님이 신혼살림을 차렸던 집.

 깨달음이 태어나 시골을 떠나기 전까지

18년간 살았던 집,

내가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인사를 드렸던 집,

깨달음이 태어나던 해에 심었다는 감나무에서

해년마다 달디단 단감이 주렁주렁 열었던 집.

시부모님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70년이 넘은

이층 목조건물이였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함께 늙어갔던 시댁집이 이젠 사람이 살 수도 

없고 기억 속에 묻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 아마 우리집도 곧 해체할 것 같애 ]

[ 부동산 관리자랑 얘기 했어? ]

[ 얘기는 작년부터 했던 건데,,너무 헐값에

가져가려는 것도 있고 그냥 처분할까 싶다가도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그래도 어차피 이젠 

이 집에서 못 사니까 처분해야겠지....]

시부모님은 2년전, 요양원에 들어가시면서 바로

아들들에게 집은 알아서 처분하라고 하셨다.

서방님은 모든 결정권을 장남인 깨달음에게

맡겼는데 깨달음은 쉽게 마음 정리가

 안 되는 모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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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다닐 때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아 항상 여자애들이 깨달음 곁에 있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시간만 나면 윗동네에 사는

 한국인(재일동포)집에 가서 놀다 오면서 처음보는

 물건들을 자주 가져왔었고, 대학에 합격하고

도쿄로 아들을 혼자 보낼 때는 섭섭한 마음을

들키지 않게 감추느라 힘들었다던 시부모님,

아들이 보고 싶어지면 2층 깨달음방에 올라가

아들의 빈 책상을 만져보셨다고 했다.

내가 갈 때마다 안방에 모여앉아

도란도란 깨달음의 과거사?를 생생히 들려주시며

그 시간들을 그리워하셨던 모습이

 엊그저 같은데...

그렇게 귀하고 소중한 기억들이 곳곳에 

배어있는 그 집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집에 돌아와서도 별다른 말이 없는

깨달음 가슴에도 슬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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