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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역에서 (에세이)9

이혼 후 친구가 보내 온 메일 케이님께하루의 끝, 거실에 불이 꺼지고 집 안이 고요해지면 비로소 외로움이 소리를 냅니다.그 소리는 아주 낯익어서,,,이혼 후 처음 맞이한 겨울밤처럼, 내 안의공허가 벽을 타고 흘러내립니다.50대라는 나이는 참 애매하네요. 젊지도, 완전히 늙지도 않은,사랑을 말하기엔 늦은 것 같고, 체념하기엔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이 선명한데..주말마다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마트에서는 손을 꼭 잡은 부부가 장을 보고,카페 창가에는 자식 자랑에 웃음꽃 피운또래 여자들이 앉아 있었습니다.나는 혼자 커피를 마시다가잔잔한 음악 속에서 무심히핸드폰을 내려다보는데그 누구에게도 연락할 이유가, 연락이 올가능성도 없다는 걸 알게 되자슬픔이 차올랐습니다. 밤이면 더 심해지는데 침대는 너무 크고,이불은 싸늘하기만.. 2025. 7. 13.
카톡 속에 숨겨둔 사랑 바쁘다는 핑계로 너를 피하다가 집 앞 골목에서 마주치던 날.[ 당신을 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어.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서 볼 수 있게 ]라며 졸린 눈으로 날 바라봤지. 한 달이 넘도록 바보처럼 날 기다리길래모진 말로 핀잔을 주던 날,[ 당신을 만날 생각을 하니까 하나도지루하지 않았어. 미안해 ]라며 울먹였지.서울에서 광주까지 매주마다 내려오는너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하던 날.[ 스피드 잘 나오는 스포츠 차로 바꿀 거야,그러면 광주까지 3시간 안에 올 수 있어 ]라고콧노래를 불렀었지. 내가 진지하게 다시는 사랑 같은 걸안 할 생각이라고 널 밀어냈던 날,[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다는 거야? 그렇다면내가 시계라도 몇 개 사 줄까 ]라며 웃었지. 매일 밤 전화로 보고 싶다고 애달파하는너에게 눈앞에 안 .. 2025. 5. 28.
미치코의 효도 스타일 정 상에게과연 소포가 무사히 잘 도착했을까?웬 소포인가 싶겠는데 나는 지금 아버지 고향인쿠마모토(熊本)에 와 있어.왜 갑자기 왔냐면 아버지가 다음 달에 갑상선암으로 입원을 하게 됐는데 병원들어가기 전에 고향에 한 번 가고 싶다고 그래서회사에 연차 내고 왔지.쿠마모토는 알다시피 말고기가 유명해서 조금보냈는데 정 상 입에 맞을지 약간 걱정이 되지만정 상은 요리를 잘하니까 어떻게든 만들어 먹을 거라 믿을 게. 올 해로 85살이 된 아버지는 이제 눈도 어둡고, 귀도 보청기 없이는 대화가 힘든 상태이지만 난 하나도 고생스럽게 생각되지 않아서 다행이야.이렇게 아버지가 나를 의지해 줘서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 하루하루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자꾸만 절벽끝으로 내몰리는 것 같아서두렵기도 하고 슬퍼지는데 이.. 2025. 4. 23.
장례식장에서 다짐을 했다 [라멘 좀 그만 먹어라고, 밀가루가 몸에 안 좋다고몇 번을 말 해야 알아먹는 거야? ]그 사람이 라멘을 그렇게 좋아했는데난 정말 싫었어. 그래서 라멘을 먹을 때마다눈총을 줬거든,,,당신을 위해서라고 말은그렇게 했지만 돌이켜보면 단순히그 사람 라멘 먹는 꼴이 싫어서였어..남편이 떠난 후 집 근처 라멘집을 지나칠 때마다발걸음이 멈춰진다는 요시가와(芳川) 상.  [  양말에 구멍 난 것을 또 신는 거야? 그 색바랜 재킷은 언제 버릴거야 ! ]  그렇게 절약해야한다고 짠돌이처럼 옷 한 벌제대로 안 사 입고 궁상맞게 생활하면서돈을 모으더니 그 돈 다 써보지도 못하고떠날 거면서 뭐 하려고 그리도아등바등 살았을까.... 홀로 남은요시가와 (芳川) 상은 남편의 손길이 묻은 물건들이 눈에 띌 때마다 남편이 왜 그렇게까지.. 2025. 3. 26.
당연하지, 난 한국인이니까 [ 정 상은 지난번에도 자리를 양보하던데오늘도 양보하네, 진짜 착해 ]착한 게 아니라 연장자가 눈 앞에 서 있는데가만히 앉아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져서전철이든, 지하철, 버스에서든 몸이 먼저반응해 일어서는 난 역시 한국인이다.[ 정 상이 준 김치는 팔아도 될 만큼 맛있는데왜 그냥 막 나눠주는 거야, 아깝잖아 ]콩 한쪽도 나눠 먹는 거라 배웠고기브엔테이크식 사고가 아닌바라는 거 없이 주고 받고 자란 덕분에 계산하지 않고 같이 나눠먹고 싶은 마음이드는 난 역시 한국인이다.[ 정 상이 자기 의견을 확실히 말해준 덕분에일이 빨리 진행되서 고마워 ]주위 눈치보면서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그렇다고 내 이익을 위해 불합리한 선택을하고 싶지 않아서싫은 건 싫은 것이고 좋은 건 좋은 거라자기 감정에 솔직한 난 역시 한국인이다.. 2025. 3. 12.
하네다공항 도착로비에서-1 주연이가 도착할 시간보다 훨씬일찍 나와서 방황하듯 공항 터미널을끝에서 끝까지 걷고 되돌아오길 반복했다.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걸어야 할지 몰라자꾸만 답을 찾고 싶어 마냥 걸었다.[ 난 언니가 부러워 ][ 뭐가 부러운데? ][ 그냥,모든 게, 난 언니처럼 못 버틸 거야 ][  가장 부러운 게 뭔데? ][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산 다는 것 ][ 그럼 너도 한국을 벗어나 ][ 난,,언니,,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그냥 죽기 전에, 문득 나도 언니처럼 한 번살아보고 싶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 그럼, 한국이 아닌 곳에서 한 번 살아보고 죽어,그래야 니 삶에게 덜 미안하지 않냐? ] [ 내 삶? 미안할 게 뭐 있어..나름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그럼, 지금부터는 열심히 살지 마, 그냥 아무것도 하지.. 2025. 2. 27.
신주쿠에 부는 북풍을 맞으며 수업이 없는 주말이면 코리아타운이 있는신오쿠보(新大久保)를 정처 없이 걸었다.어딘가에 내 집이 있을 것만 같아서 길 잃은 아이처럼 좁은 골목을또 돌아 또 돌아 걷기도하고한글이 빼곡히 적힌 어느 한식당간판 앞에서 멍하게 메뉴판들을 읽었다.늦은 밤까지 아르바이트를 할 때면멀리서 들려오는 한국어가 반가우면서도부끄러워 펼쳐놓은 좌판과 거리를 두었다.노점에서 물건을 판다는 게 유학생으로 보여지지 않을까 봐괜한 자격지심에 등을 돌리거나 모자를깊숙이 눌러쓰고 내 정체를 숨기려했던 적도 있었다.콘비니(コンビニ) 불빛을 조명 삼아이랏샤이마세( いらっしゃいませ)를지나는 행인들에게 쉼없이 외쳤던 시간들.밤이 깊어지면 야쿠자들과 호스트들이진한 향수냄새를 풍기며 인도를 활보하고나는 그들을 최대한 선한 눈으로 바라봤다.혹시나 장.. 2025. 2. 12.
가슴 속, 희망을 날려 보낸다 미야코지마(宮古島)는 오키나와에서 남쪽으로300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섬으로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을가지고 있다.오키나와에서 네 번째로 큰 섬으로1,690m의  일본 최대급 대교쿠리마오오하시(来間大橋)가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많다. 하지만주변을 둘러보면 사탕수수밭이 대부분이고인구 감소률이 심각해 관광객의유무에 따라 섬의 존폐위기에 달려있다고 택시 드라이버가 볼멘소릴 한다.정해둔 목적지에 도착을 하고 나서깨달음은 내게 동전을 몇 개 달라고 했다.미야코신사에서 참배해야 한다고, 일본은 신사마다 모시는 신이 다르기에각자가 필요에 맞는 신이 계신 곳을 찾아다니기도 하지만 그냥 신사가 보이면누구나 할 거 없이 모두가 그곳에서참배를 하는 게 하나의 풍습처럼 자리 잡혀 있다.입구에서 헤어진 깨달음은 무엇을 빌었.. 2025. 1. 20.
아들이 야구를 그만 두다 도훈이가 야구를 그만 둔대.소년야구 때부터 지금까지  했는데..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는 아직 안 했다네..다음 달에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모일 거래..  도훈이가 야구를 그만 둔대.코치도 말리지 않았다네.집에 있는 트로피를 박스에 처박더라,,도훈이가 야구를 그만 둔대.태어나 처음으로 들었대, 그 소리를,,도훈이가 나한테 묻더라한국인(韓国人)과 조선인(朝鮮人)은뭐가 다르냐고,,  도훈이가 야구를 그만 둔대.우리랑 아주 친했거든,마사토(雅人) 네 가족이랑,,친척들하고도왕래가 있을 만큼 돈독한 사이었어.. 도훈이가 야구를 그만 둔대.사람이 싫어졌다네. 절친의 부모에게서그런 소릴 들을 거라 상상도 못했던 모양이야, 도훈이가 야구를 그만 둔대.그래서 나도 좋을 대로 하라고 했어.그 대신 마사토 부모에겐부모인 우리가 .. 2025. 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