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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본은..

시아버지가 자식에게 미안했다는 그 기억

by 일본의 케이 2019.08.24

호텔을 나와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깨달음은

오랜만에 보는 메뚜기가 신기하다면서

쪼그려앉아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을 가까이 대면 댈수록 메뚜기는 

저 멀리 도망을 쳤고 깨달음은 그 뒤를 밟으며

자신이 찍고 싶은 각도를 찾느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직도 한 낮이면 기온은 32도까지 올라가고 

있지만 메뚜기가 보인다는 건 가을이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는 신호였다.


요양원에서는 아침식사를 마친 두분이서

우리가 오는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오셨다.

아버님 방으로 옮겨 두 분께 용돈을 드리고

필요한 게 또 있는지 여쭤 보았다.

아무것도 필요없다시며 집에는 가봤냐고 

물으셨고 깨달음은 안 갔다고 이제 갈 일이 

없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 그래,,갈 필요가 없겠지..쓸만한 것들은

다 뺐어? 앨범이랑 그릇같은 것, 기모노는? ]

[ 그릇같은 것도 다 버려야 돼. 기모노는 아직 

그냥 뒀는데...그것도 이제 처분해야지 ]

우린 언제나 시댁에 내려오면 요양원에 들렀다가

 시댁집으로 가서 집상태를 확인하기도 하고

 앞마당의 잡풀을 뜯거나 살충제도 뿌리고

관리를 했는데 이번에는 가지 않았다.

지난 설연휴에 왔을 때 하루종일 거의 모든 

물건들을 정리하기도 했고 깨달음이 시댁집을 

매매할 결심이 서서인지 이번은 처음부터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잘 했다고 잘 한 결정이라고 말씀하시는 아버님이

 그곳에서 두 아들이 잘 자라줘서 고마웠다고 하신다.

깨달음이 태어나고 심은 단감나무,

 둘째가 태어나면서 또 감나무를 심어 아들들의

 성장과 함께 감나무들도 커 가는 걸 지켜봤단다. 

그 집에서 두 아들이 고생도 많이 했다며 지금도

 잊혀지는 않은 깨달음 어릴적 기억을 말씀하셨다.

깨달음이 초등학교 4학년무렵, 그 당시 일본에는

역도산의 프로레슬링이 엄청난 인기였단다.


역도산, 본명(김 신락 金信洛)함경남도 출신, 

1939년 일본에 건너가 모모타(百田光浩)로 개명,

 이듬해부터 역도산(力道山)이라는 별명으로 

일본씨름(스모)을 시작했다.

1949년 26세로 세키와키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1951년 세계적인 프로레슬러인 브란스(Branth, B.)

일본원정을 계기로 프로레슬러로 전향하였다.


그 시절, 테레비젼이 흔하지 않아서 맞은 편에 살던

 깨달음의 큰 집(임업으로 성공한 지역 유지였음),

그 집에서 역도산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동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시청을 했단다.

그 날도 역도산 경기를 보러 깨달음이 동생이랑

  간다고 해서 가서 보라고 해 놓고 조금 있다가

아버님도 잘 보고 있는지 궁금해 가 봤더니 

마당 제일 뒤에서 두 아들이 무릎을 끓고 앞에

 얘들 때문에 거의 테레비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더란다.

그래서 왜 여기서 보냐고 잘 보이게 

좀 앞으로 가라고 했더니 깨달음이

앞으로 가면 큰아버지한테 야단 맞는다면서

그냥 거기서 보겠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괜찮다고 너희들은 친척이니까

앞으로 가도 된다고 해도 아니라고 여기 

왔을 때부터 큰 아버지가 뒤에 가서 보라고 

했다며 앞으로 안 간다고 하더란다.

초등학교 4학년이 눈치를 보면서 자신에게

괜찮다고 아버님을 돌려보냈다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속이 상하셨단다.

그래서 큰 맘 먹고 돈을 모아 2달만에 

테레비젼을 샀다고 하신다.


친척이였는데도 그랬냐고 내가 불쑥 물었다.

[ 응, 그 큰집이 돈에 눈이 멀어서 아주 못 됐어.

내가 그 날, 얼마나 서운하고 서럽던지

우리 자식들까지 무시한다는 생각에,,그리고

깨달음이 괜찮다고 자기들은 멀리서 봐도

충분히 보인다면서 됐다고, 눈빛으로 나를

 위로해주며 집에 가라고 하는데 더 가슴이 

아파서 지금도 잊어지지 않아, 그 일이

얼마나 자식들에게 미안하던지.. ]

어머님도 옆에서 한마디 거드셨다.

그래서 큰집 자식들이 다 못 되게 되고

병을 얻고 빚져서 남에게 피해만 주고 떠났다고,,

옆에서 피식피식 웃으며 듣고 있던 깨달음이 

 기억한다면서 자기는 그냥 뒤에서 역도산

 경기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며

아버님이 속상해 하신지 몰랐단다. 

 

그렇게 어렵게 컸어도 잘 자라줘서 너무 고맙고

그래도 그 집에서 아무 탈 없이 요양원에 

들어올때까지 잘 지냈다며 아들들의 성장이

 곳곳마다 묻어있어 참 좋았다고 하신다.

[ 아버지, 집 팔지 말고, 그냥 둘까?]

[ 아니..그냥 둬도 어차피 이제는 들어가서 

살지도 못하니까,,그냥 처분해...] 

[ 나도 그냥 놔 둬두고 싶은데 사람이 안 살면

집이 망가지고 누가 가깝게 살면서 관리를 

안 하니까 이젠 사람이 살 수가 없는 상태야 ]

[ 알아,,알고 있단다. 그니까 정리해..] 


아버님은 데릴사위로 어머님과 결혼을 하셨다.

결혼과 동시에 어머님 집안의 임업을 도왔는데

큰집에서 일 한만큼 임금도 주지 않고

불합리한 일들이 많아 10년만에 그 쪽일을 

그만두고 제약회사에 취직을 하셨다.

그렇게 큰집과 거리를 두고 살게 됐지만

가진 자만의 갑질?같은 게 있어 이래저래

마음고생을 하셨고 자식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많이 갖고 계셨다.   

자신의 능력부족으로 자식들이 서러움을

받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셨다.

자신은 무시를 당해도 괜찮지만 자식만큼은 

당당하게 대우받기 바라셨던 아버님.

깨달음이 성장하면서 겪었던 어릴적 슬픈

 사연?이 있는지 나는 이날에서야 알았다.

아버님은 지금까지 아프게 기억하는 것을 정작 자식인

 깨달음은 타고난 긍정마인드로 대처했던 것 같다.

이제는 그런 추억들만 간직하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지만 여전히 자식에게 

미안하고 그 속상했던 순간들을 부모는

 늘 가슴에 남겨두고 있는 모양이다.

 이젠 잊으셔도 좋으련만,,그렇게 걱정하고 잘 

키워주신 덕분에 이렇게 바르게 잘 컸으니...

부모라는 이름은 항상 자식에게 

미안해 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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