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치를 함께 하기로 했다.
햇수로 3년 만에 보는 그녀는 날 보자마자
포옹을 하며 밝게 웃어주었다.
한국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는
민희(가명)은 오늘 식사를 위해
아침까지 굶고 왔다고 했다.
런치정식외에도 갈비 수프와 냉면까지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들을 한꺼번에
주문한 민희는 3년간 있었던 일들은
식사를 한 뒤에 얘기하자며 잠시
먹는 일에 충실하고 싶다고 했다.
난 그녀가 먹기 편하게 고기를 구웠고
민희는 고기가 익어가는 순간을 눈여겨보면서
흰쌀밥에 나물과 상추겉절이를 모두 넣고
달달한 고추장으로 쓱쓱 비벼 비빔밥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잘 구워진 고기를 올려 먹었다.
그동안 한국음식을 못 먹었던
한을 풀고 있는 듯이 행복해 하며 먹었다.
[ 민희야, 천천히 먹어..]
[ 양념들이 달긴 한데 오랜만에
먹어서인지 꿀맛이야, 언니 ]
[ 회사 주변에 한국식당 있다면서 왜
안 먹었어? 먹고 싶을 때 먹어야지 ]
[ 나,,혼자 먹는 거 싫어하잖아, 특히
한국음식을 혼자 사 먹는다는 게
괜히 슬픈 생각이 들어서 그냥 참았어 ]
[ 바보,,참기는 뭐하러 참아,, 그냥 먹지..]
[ 참, 언니도 한국 못 들어갔겠네 ]
[ 응, 가려다가 못갔지....]
멀쓱한 표정을 보이고는 남은 내 밥까지
가져가 갈비 수프에 넣어 먹었다.
[ 언니. 나 살 쪘지?]
[ 음,, 좀 찐 거 같긴 한데..]
남은 냉면 가닥을 마지막으로 후루룩 입에 넣고는
느닷없이 자기도 내일모레면 마흔이 된다면서
아무것도 해 놓은 게 없는데 벌써 마흔이란 게
요즘 들어 회의가 느껴진다고 했다.
[ 벌써 마흔? 하긴 너도 일본에서 20년 가까이 되니까,
영주권은 받았어? ]
[ 아니, 너무 바빠서 신청할 틈이 없었어 ]
[ 민희야, 너 요즘에도 남의 일까지 맡아서 해? ]
[ 아니, 이젠 체력이 안 따라줘서 못해 ]
[그럼 다행이고,, ]
흔히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칭하는 사람이 바로 민희였다.
지난 3년간 민희는 회사에서 영업까지 맡게
되었고 휴일도 없이 일하다가 과로로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간 적이 있었고 경쟁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는데 일단 보류한 상태이고
독립을 하려고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자신감이
떨어져 분위기를 엿보고 있는 중이고
회사 매출액의 70%를 자신이 했음에도
월급 인상에 협조적이지 않은 사장님과는
요즘 냉랭한 상태이고, 코로나 시대에 맞춰 자비로
PCR검사기를 대량 구입해 관계자들에게
매번 돌렸더니 까탈스러운 여자로
낙인이 찍였단다.
3년 전과 월급이 동일한데
자비로 PCR검사기를 샀다는 말을 듣고
여전히 변함없이 착하게,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살고 있는 민희임을 확인했다.
[ 하나도 안 변했네.. 니가 뭐하러 PCR검사기를 사?
그것은 사장이 할 일이고 거래처에서 해야지 ]
[ 아니,, 내가 안심하고 일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다들 검사하고 나면 편하게 일 할 수 있잖아 ]
[ 어이그,,,,여전하네...]
디저트를 다 먹고 일어나려는데 깨달음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린 가까운 커피숍에서 합류했다.
오랜만에 보는 깨달음도 반가워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 깨달음,, 민희,, 하나도 안 변했어..]
[ 그래? 그러면 안 된다고 당신이 교육하지
않았어? ]
[ 그래도 안 되나 봐,,]
[ 민희 씨, 여기 언니에 성격을 좀 본받을 필요가 있어,
이 언니처럼 살아야 돼. 센 언니로,
곤조가 보통이 아니잖아,, ]
내가 째려보는 걸 느꼈는지 얼른 내 눈치를 살폈다.
지금 성격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남을 위해 살지 말고
온전히 자신을 위해 살았으면 하는 거라고
했더니 착하게 사는 게 나쁜 건 아니란다.
[ 아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착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아픈데 안 아프다고,
힘든데 안 힘들다고,
슬픈데 안 슬픈 척 나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느라 자신이 버거워지는 삶은
이제 조금만 했으면 한다는 거야 ]
갑자기 흥분하는 나를 보고 민희가 피식
웃으면서 언니네도 하나도 안 변했네라고 했다.
깨달음은 일 한만큼 대가를 받고 있는지
그게 가장 궁금해했고, 자신의 능력에
준하지 못한 임금이라면 사장과 다시 한번
면담을 하고 개선의 여지가 없으면
미련을 두지 말고 퇴사하는 게 정답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회사 사장이 나쁜 놈이네, 근로기준법에
어근 나네, 마네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둘은 촬영 현장에서 있었던 얘기들을 나누며
깨달음은 사장의 시각으로 조언을 하고 그녀는
크리에이터로서 입장을 어필하며 얘길 나눴다.
난 차를 마시며 둘이 하는 얘기를 듣다가
문득, 나와 그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에게 받았던 배려가 참 많았다.
어쩌면 나는 그녀의 성격, 성품을
닮고 싶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없는 너그러움과 부드러움..
섬세하고 어른스러웠던 그녀의 따스함이
힘들었던 날 붙잡아 준 기억들이 많다.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후배였지만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탄하고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커피숍에서 두 시간 이상 수다를 떨고 나온 우리는
5월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민희는 처음 봤을 때부터 매사 긍정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늘 느긋하고 여유로웠고
풍족하지 않아도 밝고 건강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대학생이었다.
이렇게 10년이상의 시간들이 훌쩍 지나갔어도 전혀
변함없는 그녀는 진심으로 남을 위한 배려를 하며
자신이 비록 없어도 함께 나눌 줄 알고,
좀 불편해도 상대를 위해서라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하며 상대의 아픔을 아무도 모르게
살포시 만져주는 착한 성품 그대로
40대를 맞이하는 것 같다.
너무 착하게 살지 말라고 주입시켰던 난
참 속물적이었음을 인정하고
그런 악마의 속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착한 모습인 그녀에게 감사하다.
그래도 가끔은 자신을 위해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해주면
더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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