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집에 도착해서 바로 깨달음은
선물꾸러미를 풀어 엄마에게 며칠 늦은
생신 선물을 전해드렸다.
[ 오메,이 비싼 놈을,,사지 마라 그래도 사네..
나같은 늙은이가 좋은 놈 해봐야 소용없는디 ]
좀 밝은 색을 샀는데 어머니 피부에 맞을지
모르겠다며 깨달음이 한 번 둘러 보시라고
권했지만 엄마는 좋은 옷 입고 정식으로
해보겠다며 그것보다 어서 식사를 하러
가자며 해물찜 식당으로 서둘러 갔다.
집으로 돌아온 깨달음은 쇼파에 다리를 한쪽을
걸치고 까딱까딱 하면서 한국말뿐인 드라마를
마치 줄거리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웃으면서 늦은 시간까지 TV를 봤다.
다음날은 모든 가족들이 오는 날이여서
아침부터 엄마는 분주히 움직였다.
[ 엄마, 뭐 하지 말라고 전화까지 드렸는데
뭘 이렇게 많이 준비하셨어? ]
[ 어제 저녁은 식당에서 먹었응께, 오늘 아침은
그래도 깨서방이 좋아한 것 좀 해 줘야 덜
미안할 것 같아서 나물만 몇 가지 준비했다 ]
나물만 몇 가지가 아니 각종 메뉴가 많아서
나도 함께 아침상을 준비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고 깨달음이 무슨 박스를
들고와서 열어보고는 떡인 것같다고 했다.
[ 엄마, 무슨 떡이야? ]
[ 아니, 약밥 좀 주문했는디 인자 왔구만,
깨서방 따뜻할 때 하나 먹어보라 그래라 ]
엄마 말을 전해주기도 전에 깨달음은 벌써
한 입 물고 멀쓱했는지 나를 쳐다봤다.
아침부터 홍어와 낙지를 맛있게 먹은 언니네와
우린 아빠가 계신 추모관으로 자릴 옮겼다.
내가 미리 사 온 단팥빵을 받아든 깨달음이
두 손에 받쳐들고 묵념을 하고나서
그 빵을 고스란히 큰 언니에게 건넸다.
큰 언니도 얼떨결에 받아든 단팥빵을
손을 들고 아빠에게 기도를 드렸다.
돌아가시고 7년이 되고서야 단팥빵을
사 드릴 생각을 했다는게
더더욱 죄송스러웠다.
https://keijapan.tistory.com/1224
(부모와 자식, 뒤늦은 참회)
지난해 왔을 때 비어있던 곳에 새로운 분이
들어오신 것 같아 살포시 내다 봤더니
거기엔 제삿상 미니츄어가 들어가 있었다.
고인들이 평소에 즐겨하셨던 취미활동이나
직업에 관련된 소품들이 하나씩 놓여 있는
모습들이 애잔했다. 여행용 캐리어, 골프채,
소주와 삼겹살이 놓인 주안상,
미용기구, 미니 탁구대, 애완견 등,,,
리얼리티가 있어 아이디어가 좋다며
깨달음이 한마디 한다.
집으로 돌아오니 서울에서 조카들도
다 내려와 있었고 약간의 담소를 나눈 뒤
아빠 7주기 추도예배를 시작했다.
찬송가의 울림이 공허함만 더해갔다.
깨달음은 한글이여서 읽을 수 없었지만
자신이 아는 멜로디였다며 옷을 갈아입는 동안
허밍으로 찬송가를 다시 불렀다.
[ 저녁은 뭐 먹는거야? 식당으로 가는 거지?]
[ 응 , 당신이 좋아하는 갈비래,
달궈진 돌판에 굽는 석갈비라는데
나도 안 먹어봐서 몰라 ]
한 테이블에 4인분씩 나온 석갈비를 깨달음이
얼마나 잘 먹던지 앞에 앉았던 중학생
조카가 신기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배춧잎에 한 번, 상추에 한 번, 깻잎에 한 번,
매운 고추와 구운 마늘, 된장으로 마무리해서
먹고 또 먹고,,,
[ 깨서방이 쌈을 좋아한갑서 ]
[ 응, 뭐 든지 잘 먹어 ]
[ 달짝지근하니 깨서방 입맛에 맞은 갑다.
많이 드시라고 해라 ]
[ 그렇지 않아도 여기 고기 다 먹고 있어 ]
앞에 앉은 조카 둘은 석갈비가 썩 마음에
안 드는지 몇 번 젓가락질만 하다 말았고
나역시도 두어번 먹고 나니 질려서
맥주만 홀짝거리고 있었는데
깨달음은 혼자 3인분을 먹었다.
그렇게 깨달음이 대만족한 저녁식사가 끝나고
조카들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고 남은
식구들과 4월달 고사리축제에 제주도를
가는데 올 해도 내가 제주도에서 한달 살이를
할 예정인지 그런 얘기들을 나눴다.
깨달음은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다리 한쪽을
팔걸이에 걸친 채 건들건들거리며 우리들 얘기를
듣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지, 한번씩 우리쪽을
쳐다보며 티브이 체널을 쉴새없이 돌리다
알 수없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11시가 넘어서 깨달음은 잠자리에 들었고
우린 엄마방에서 또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
방에 들어갔더니 깨달음이 눈을 떴다.
[ 미안, 얼른 다시 자 ]
[ 꿈을 꿨는데..]
[ 무슨 꿈,,,]
[ 안면은 있는데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이
신발을 신고 우리 사무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웃더라고..]
[ 처음 보는 사람이였어? ]
[ 응, 모르는 사람인 것 같은데 낯설지는 않은
어디서 본 듯한 그런 아저씨였어,
60대쯤 된 아저씨.... ]
[ 혹시 우리 아빠였을까? ]
[ 아버님 얼굴은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나를 보고 아주 친하것처럼 웃으셨어..]
[ 알았어, 그만 자 ]
아마도 추모관에서 내가 아빠 구두 얘길
했던 게 꿈에 나온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치매에 걸리기 전에는 참 많은 일을
하셨는데 항상 멋진 가죽구두를 한컬레를
갖고 싶어하셨다. 그 당시, 대학원 재학중이던
나는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 사는 게
바쁘고 우선이여서 사드리지 못했고,
아니, 사드리지 않았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수의를 입혀드리던 날,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힌 발에 새 버선을 신겨
드리는데 끝내 사드리지 못했던 구두가
마음에 걸려 가슴을 쓸어내려야했다.
소가죽으로 만들어진 구두를 사드리기 위해
일본에서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겨우 한컬레
찾아 49일이 지나기 전에 넣어드렸었다.
부질없는 후회이고 너무 늦은 효도라는 걸
알면서도 내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
넣어드렸던 것 같다. 그렇게 아빠를
떠나보내고 7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아빠에게 못 되게 굴었던 것, 아빠를
아프게 했던 말들만 지워지지않고
선명히 가슴에 남아있다.
비울 수도, 덜어낼 수도 없는 마음에 짐을
더 이상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홀로 계신
엄마에게 참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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