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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

사람냄새 나는 인간관계

by 일본의 케이 2024.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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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먼저 도착한 나는 뭘 사는 게 좋을지

두리번두리번 매장 안을 둘러봤다.

평균 나이 45살이니 너무 달달한 건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내 입맛을 기준으로

패스를 하고 쿠키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참석하면 기분 좋아지는 모임이라는 걸

머릿속 어느 세포가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난 조금 들 떠 있었다.

 

나를 포함해 6명이 이른 송년회를 가졌다.

말은 송년회지만 서로가 얼굴 보고

올 한 해 지구상에서 일어난 일부터

주변에 발생했던 문제들, 아주 사적인 생각들,

그리고 직장에서 쌓였던 불만과

얽힌 인간관계까지 뭐든지

풀어내는 자리이다.

한 명이 늦어진다고 연락이 와서 우린 

기다리지 않고 바로 건배를 했다.

그리고 아까 준비한 선물들을 하나씩

나눠주자 그들도 각자 준비해 온 것들을

교환하는 시간이 만들어졌다.

 

[ 올 한 해,, 너무 피곤했어...]

노무라( 野村)상은 생맥주를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키며 캬-하고 길게 뱉어냈다.

 스즈키(鈴木)상은 내가 보내준 김치를

너무 잘 먹었다며 행여나 다른 사람이

들릴까 봐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내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아카네(赤根)상은 이미 코스로 주문한

요리들을 하나씩 체크하면서

추가 주문하고 싶은 튀김이 있는데

언제가 좋은지 모르겠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카모토(坂本)상은 맥주를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언제나처럼 

핸드폰을 꺼내  메일을 체크하고는

답신을 보내고 있었다.

 

보란티어 단체에서 만나 우리들은

2년 만에 다시 모이게 되었다.

40대와 50대가 각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보란티어라는 봉사단체를

통해 알게 되면서 친해졌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친구처럼, 동료처럼,

이웃 같은 사이가 되어 있었다.

 

[  정 상 소식은 작년에 듣긴 했는데

정말 그만둔 거야? 그 좋은 자리를? ]

[ 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 오,,, 정 상,, 너무 멋지다..

나도 정 상처럼 다 놔 버리고 싶은데..

부럽다,, 진짜 부러워,,,]

나를 만나면 꼭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는

사카모토 상이 사직한 이유를 듣고 싶다는 

눈빛으로 내 눈을 응시했다.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고 말하려다

그냥 일하기 싫어서라고 답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카네 상이

정 상 남편이 능력자이기 때문에 정 상이 굳이

일을 안 해도 노후가 보장되기 때문일 거라면서

깨달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얘길 했다.

자기 친척 중에 건축회사 사장이 있다며

연봉이 얼마며 총자산이 어느 정도 된다는 둥

내가 점점 공감하기 힘든 금액이 나오길래

수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손을 들었다.

 

[ 잠깐만,, 나,, 거기는 그만뒀지만

백수는 아닙니다. 저도 벌어야 하니까요,

  노후는 각자 책임지기로 했거든요 ]

[ 아,, 그래? 일 다시 시작했어?  ]

난 가방에서 새로 판 명함을 꺼내 한 장씩

나눠줬더니 또 야유 같은 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때마침, 오타케 (大竹) 상이 들어오면서

늦어서 미안하다며 코트를 거칠게 벗어

놓고는 회사를 때려치고 싶다고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일은 소처럼 부려먹는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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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서로에게 있었던 좋았던 일,

힘들었던 일들을 토로하며 본격적으로

술을 마셔댔다.

아카네 상은 고등학생 딸이 남친이

생겼는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질투가 나서 

딸 얼굴만 보면 짜증을 내고 있다고 하고

오타케 상은 회사 상사가 얼마나

자린고비인지 태어나 처음 보는

인간형이라고 씩씩 거렸고

노무라 상은 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홀로 남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데

노인들과 함께 살면서 느끼는

고충들을 털어놓았다. 

 

스즈키 상은 예전에 산 주식을 다 팔고

니사(비과세주식투자)로 바꿨는데

수익이 좋아서 와이프랑

유럽 여행 다녀왔다고 한다.

여행 얘기가 나오면서 해외 원정 

보란티어를 다 같이 해보는 게 어떠냐는

말이 나왔고 우린 갑자기 열띤

토론 같은 걸 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경험했던 국제행사 보란티어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일을 했으며

문제점들을 나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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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국제 행사가 많지만 특히

장애인 관련 행사에 참가하는 게

우리들이 할 일이 많아서 보람이

있지 않겠냐라는 대화도 나눴다.

술이 기분 좋게 취해질 쯤에 종업원이

테이블 마감 시간 15분 전이라고

알려주고 갔다.

우리는  생맥주를 모두 한 손에 치켜들고

마지막 건배를 하며 너무 아쉬우니까

내년 초에 신년회를 갖자고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아빠와 엄마로

성실히 살아가는 40대, 50대 아줌마

아저씨들이 2년 만에 만나니 할 얘기들이

넘쳐나서 2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다.

[ 정 상, 신년회 빨리 날 잡아서

라인으로 모두에게 알려줘 ]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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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에서 아카네 상이 이제 총무도 아닌데

왜 정 상한테 일을 시키냐면서 핀잔을 주자

스즈키 상이 정 상이 우리들 중에

제일 약속을 잘 지키니까

부탁하는 거라고 했다.

이자카야를 나와 모두가 전철역으로

헤어지는데 스즈키 상이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역까지 같이 걸었다.

혹시 김치를 판매할 수 있냐고 묻길래

판매는 안 하고 나눔은 하고 있으니

언제든지 말씀하시라고 했더니

자기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싶다고 했다.

모두와 헤어지고 전철에 올라

차창에 기댄 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엄마에겐 딸이 최고다

아침에 눈을 떠 사방을 살피고서야 이곳이 내 방인걸 인식했다. 한국에서 돌아와 2주가 지나가는데 지금도 가끔 잠에서 깨어나면 이곳이 어딘가 엄마집인지, 호텔인지, 제주도인지 착각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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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자도 별 반 다를 게 없다.

3일 전부터 복통을 동반한 설사를 했던 깨달음은 이틀간 금식을 했다. 코로나인지, 아니면 식중독인지, 그냥 단순한 배탈인지 신경이 쓰이는데 깨달음은 그냥 배탈 난 거라고 요 며칠 더워서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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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동안 누구한테 뒤질세라 서로가

자기 얘기들을 앞다퉈하는 모습에서

오랜만에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어 좋았다. 

전부를 까발려 보여주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공감하고 이해하고 인정하며 격려하는

인간관계는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밑바탕이 되어주는 것  같다.

얼마 남지 않은 2024년 마무리를 잘하라고

내년에 또 만나자는 라인을 모두에게

보내고 나니 슬슬 잠이 몰려왔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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