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다행히 환자는 아무도 없었다.
병원 입구의 출입문은 물론 치료실 문도
모두 열어둔 채 환기를 시키고 있는 듯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찬 바람을 막아주기 위해
작은 탁상용 난로가 좌우 열심히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지만 전혀 따뜻함이 전달되지 않았다.
환자가 나 뿐인데 간호사는 서류를 정리하는지
좀처럼 날 부르지 않았고,, 그냥 그러러니 하고
잠자코 기다렸다.
원장님은 오늘도 두꺼운 안경을 치켜올리며
나와 차트를 번갈아 보셨다.
[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오셨죠? ]
[ 아니.. 그것도 그렇고 제 입술이...]
[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힘든 일 하셨어요? ]
[ 아니요,, 평소와 별 반 다를 게 없었는데..]
[ 식사는 잘하셨나요? ]
[ 네,,]
[ 이게 몸이 피곤하거나, 면역이 떨어졌을 때
생기거든요. 근데 지난주에도 생겼다고요? ]
일주일 간격으로 입술에 잔 물집이 생겼다.
헤르페스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외관상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아 괜찮았지만
2주동안 물집이 터지고 쓰라리고
따끔거리기를 반복했다.
[ 이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몸에 잠복하고
있다가 스트레스라던가, 피로, 면역력이
떨어질 때면 바로 재발이 되는데
2주 연속 물집이 생겼다면 몸이 꽤
힘들다는 신호예요]
환자가 나뿐이어서인지 원장님은
느긋하게 이것저것 물으셨다.
삼시 세 끼를 잘 챙겨 먹냐는 질문에 그랬다고
대답했지만 실은 입맛이 없어 간단히 과일이나
야채주스로 끼니를 넘겼던 날이 계속되었고
결국엔 몸이 이렇게 변화를 금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원장님이 자신의 노트북에서 면역력을
높이는 음식들을 선별해 보여주며
등 푸른 생선, 건과류, 버섯류를 많이
먹으라고 하신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냐는 질문에
그냥 시간에 맡긴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시간이
해결해 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는 나쁜 버릇이 있음을 밝히지 않았다.
[ 선생님, 요즘 재택근무여서 특별히 할 없는데
뭐가 피곤했을까요? ]
[ 몸은 편하지만 정신이 피곤했다는 거겠죠
그러다 보니 면역도 떨어지고..
그러면 꽃가루 알레르기도 더 심해져요. ]
[...................................... ]
요즘 현대인들이 쉬는 방법을 잘 모른다며
진정한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닌 아무 생각을 안 하는 거란다.
신경을 편안하게 만들고 몸만 쉬는 게 아닌,
정신을 쉬게 하는 게 좋다면서
나 만의 시간을 갖는 것,
자기 자신의 마음을 뒤돌아 보는 것이
어찌 보면 진정한 휴식이라고 하신다.
진정한 휴식의 정의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원장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
[ 그리고 따끈한 홍삼차 같은 걸 마셔보세요.
식욕도 돌고 몸도 따뜻해져서 면역력을
올리는데 좋을 겁니다 ]
[ 홍삼차요? ]
[ 高麗人参(고려인삼)이라고 들어보셨죠?
간단히 과립으로 돼서 마시기 편하고 마시다 보면
몸에 기운이 좀 돌 겁니다 ]
갑자기 웬 한방? 인가 싶어 멍한 표정을 하는
나를 보고는 식욕증진, 면역력강화, 스트레스해소를
모두 잡아줄 수 있는 게 홍삼이 가장
적합할 것 같아서 권했다 하신다.
그러고 보니 동생이 보내준 홍삼을 매일
꾸준히 먹어야 하는데
먹다, 말다를 반복했었다.
입술에 바를 연고와 꽃가루 알레르기 약을 한 봉지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와 집에 있는 홍삼과 함께
차로 마실 수 있는 제품을 구매해야
할 것 같아 노트북을 열었다.
티브이 보던 깨달음이 뭐가 궁금한지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앉는다.
[ 홍삼 찾고 있어? ]
[ 응, 원장님이 마셔보래 ]
[ 처제가 보내준 거 마시지 않았어? ]
[ 응,, 있는데,, 다른 것도 같이 마시려고..]
[ 근데 왜 이비인후과에서 홍삼 먹으래? ]
원장님이 해주신 얘길 좀 하고 다시 검색을 했다.
홍삼의 효능이 참 다양하다. 정말 이것만 마시면
모든 잔병치레 없이 튼튼해질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선전문구들이 건강스럽다.
[ 그 원장님 재일동포야?]
[ 아니.. 일본인,.. 전형적인 일본인이야 ]
[ 그래? 근데 홍삼 좋은 걸 어떻게 알았지? ]
깨달음도 의외였는지 갸우뚱거린다.
일단 차로 마실 수 있는 제품으로 검색 중인데
깨달음은 자기가 지금 마시는 게 일본에서
구매시 금액차이가 얼마인지 궁금하다더니만
자기 몫으로도 홍삼차를 주문해 달라고 했다.
[ 그 원장님이 면역에도 좋다고 권했다면 나도
마셔야 될 것 같아서...]
[.................................... ]
한국에 있을 땐 젊다는 이유로도 먹지 않았던
홍삼인데 이곳에서는 자주 접하게 되었다.
신토불이가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서
나온 것을 먹어야 체질에 잘 맞다는 말처럼
내 몸이 원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면역력 강화를 위해 일본에서 받은 처방전이
한국의 홍삼이라는 게 의외였고
왠지 반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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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한국은 구정설날이네요.
여러분, 2021년도 가정내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고 사랑 가득한 한 해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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