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5년간 디자인 회사를 다니다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자기 사무실을 차린다고
인테리어에 필요한 조언을 얻고 사무실 조명을
골라달라고 했던 후배가 갑자기
연락이 없었다.
사무실에 가구들이 들어오고 구색이 맞춰지면
오픈 파티를 하자고 라인을 보냈는데
흔히 말하는 읽씹을 한지
16일이 흐른 어제 저녁 라인이 왔다.
[ 콜록 콜록, 콜록, 언니...]
[ 기침한다며,그냥 문자 해, 통화하지 말고 ]
[ 콜록, 콜록, 콜록,,죽겠어,,콜록, 콜록,
콜록,, 약을 먹어도 안 들어,,]
[ 진짜,, 너무 심하네.... 얼른 끊어 ]
병원에서 모든 검사를 다 했지만 결과는
그냥 감기라는 말을 들었단다.
기침이 심해 목이며 폐며 죄다 검사를 했지만
전혀 이상 없이 건강하다는 소릴 들었을 때
욕이 나올 뻔했단다.
약을 벌써 2주째 먹고 있는데 정말 눈곱만큼씩만
좋아질 뿐 그대로라며 감기라는 진단 외에
아무런 이상이 없어서 다른 처방약은 주지도
않고 아무튼 7종류의 종합 감기약 같은 걸
먹는데 죽을 맛이란다.
자기 기침소리가 폐병 환자처럼 심해서
대중교통을 이용도 못하고 택시를 타는데
기침을 하면 택시 아저씨도 싫은 표정을 한단다.
사무실 오픈해서 여기저기 신고하고
신청서 내야 할 곳도 많고 은행도 가야 하는데
좀 많이 걸으면 현기증까지
나서 쓰러질 것 같단다.
그렇게 민정이와 긴 문자를 끝내고
난 바로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일단 계란을 삶고 눈에 보이는 식재료를
몽땅 꺼내 바구니에 담고 있는데 깨달음이
눈을 깜빡거리며 주방쪽으로 걸어오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 지금 밤 11시 반이야,여기서 뭐 해? ]
[ 민정이가 아프다네.. 많이...]
[ 그래? 근데 아픈데 왜 계란을 삶아? ]
[ 반찬 몇 가지 해서 가져다주려고 ]
[ 오,,, 착하다,,]
다시 들어가 자라고 그랬는데도 깨달음은
졸린 눈을 하고 무슨 반찬을 하냐고 묻기도 하고
어느 병원에 간 거냐고 알고 싶어했다.
냉장고를 구석구석 뒤져봐도 반찬거리 할 게
별로 없어서 고민스러웠지만 그냥 있는 것들을
꺼내 무치고 볶았다.
다음날, 아침에 은행일을 보고나서 민정이
사무실로 향했다. 주소만 딸랑 들고
찾아가는데 외국인들로 가득 찬
하라주쿠 메인 거리를 지나자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민정이가 오전 중에 구약소에 갈 일이 있다고 해서
택배보관함에 넣어 두기로 했는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서인지 민정이네 방은 등록이 되지 않아
보관함이 열리지 않아 집 앞에 놓아두었다.
민정이는 잠깐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우리 집 배관청소 예약이 되어 있어
나는 바로 돌아와야 했다.
[ 언니..콜록,콜록,,, 나 거의 일 끝났어 ]
[ 아니야, 지금 나 벌써 전철 탔어, 그리고
감기 옮을지 모르니까 나 갈 거야 ]
[ 콜록, 콜록,,그러긴 하는데.....]
이것저것 다양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있는 재료가 이것뿐이였다고 다음 주에 다시 한번
만들어서 또 전해 주겠다고 했더니
그때까지 다 나을 테니 꼭 커피 마시자고 한다.
난 집으로 돌아와 바로 배관청소 아저씨와 함께
주방, 세면대, 화장실, 욕실을 따라다니며
청소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인데
민정이한테서 계속해서 라인이 왔다.
[ 언니,, 나,, 눈물 났어. 오랜만에 집밥을
먹었거든,, 몇 년 만인지 몰라.
우리 엄마 밥을 안 먹은 지가 20년이 지났는데
언니 반찬을 먹는데 엄마가 떠올라서,,,]
[ 계란 장조림에 고기가 국거리용밖에 없어서
좀 기름지지 않던? ]
[ 아니 딱 좋았어, 너무 맛있어 ]
민정이는 밥을 먹으면서 일본생활 20년이 되는데
이렇게 반찬 챙겨주는 건 한국사람만이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며 누가 이렇게
가족처럼 챙겨주겠냐고
15년간 일본회사를 다니며 거의
일본 음식으로 삼끼를 먹는 생활이 습관이
되었는데 매운 고추절임을 흰 밥에 올려
먹는데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단다.
[ 언니, 역시 한국사람이 최고야, 누가 뭐래도 ]
[ 아파서 그런 생각이 들었겠지,,]
[ 아니야, 여기서 살면 살수록 그런 생각이
굳혀지고 있어. 일본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런식에 인간관계가 만들어지지 않더라구,
언니는 나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까 훨씬
뼈저리게 느낄 거 아니야 ]
[ 알았어,무슨 말인지,,이제 그만
얼른 약 먹고 쉬어 ]
[ 언니,,언니가 내 옆에 있어서
큰 행운이고 새삼 감사했어 ]
[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라,,]
민정은 내게 좀 특별한 후배이다.
내가 교수님과 갈등이 심해 뚝 하면 화장실에서
울었을 때 어느날 조용히 다가와서
지금 힘든 건 곧 좋은 일을 거라는 증거라며
위로해 주었던 민정이..
내 아픔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본
민정이가 벌써 마흔 살이 되었고
디자인 사무실을 차렸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난 여전히
디자인과 2년생 민정이를 가슴에 품고 있다.
해외 살면은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같은 나라사람이라고한다.
사기와 배신을 내 나라 사람에게
유독 많이 당하는 것도 기정 사실이지만
어려울 때 도움을 바로 받을 수 있는 것 또한
내 나라사람이다.
그래서 또 의지하고 기대고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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