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변해가고 있는 건지, 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건지 내 자신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서 있는데
한국인 관광객들이 맞은편 선로에서
들어오는 전철을 사진에 담으면서
야마노테선(山手線)은 서울의 2호선 지하철과
같은 거라며 가이드북을 보기도 하고
카메라 앵글을 바꿔가며 사진 찍느라 분주했다.
이분들은 서울에서 오셨나라는
아무 뜻도 의미도 없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우에노(上野) 의 아메요코(アメ横)는 한국의
남대문 시장같은 곳인데 오늘
난 이곳에서 약속이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만나자고 먼저 연락을
하는 일이 좀처럼 없는데 요즘 변해가고
내 감정의 흐름에 사고를 맡긴 채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
[ 케이짱, 너무 오랜만이다.
연락 줘서 진짜 고마워 ]
[ 그냥,,갑자기 잘 계시나 궁금해서..]
그녀와 난 미술치료공부를 함께 했고
실습을 같이 다니기도 했으며
뮤지컬을 함께 볼 만큼 나름 친근? 한
사이였는데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고
재혼을 하면서 서로 연락이 뜸해졌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분명 아닌데
지지부진,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서로 성격이 비슷해서 말이 통했고
뒤늦게 동갑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더 가까워져 붙어다녔었다.
[ 여기 완전 차이나타운에서
파는 물건들이 많네, 타이완인가?.. ]
우에노를 근 5년 만에 왔어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며 새로 생긴 듯한 가게들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그녀가 예전에 다니던
회사가 있어서 익숙한 곳이기도 했다.
우린 사람 구경을 하며
그동안 잘 지냈는지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재혼을 하면서 남편의 아이들과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해서 가정에만
몰두해 살았다며 그래서도
내게 연락을 못한 거라고 했다.
[ 저 외국인들은 안 추운 가 봐 ]
[ 아직 낮은 25도잖아, 나도 반팔 아직까지
정리 못했어 ]
[ 나도 그대로야 ]
생선가게를 지나면서 내가 좋아하는 영덕 게가
널브러져 있다면서 올 초에 가족들과 한국에
갔는데 부산의 어느 시장에서 봤던 것과
똑같다며 묵은 얘기들이 너무 많아
흥분된다면서 그녀가 단골로 다녔던
한국 가정요릿집으로 향했다.
코로나로 문 닫은 가게가 많아서 행여
그곳도 폐업을 했는가 싶어 전화를
걸어봤더니 그대로여서 예약까지 해뒀단다.
유이 (ゆい) 짱이 앞장서는대로 따라가는데
역에서 벗어나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막걸리를 주문하고 건배하는 걸 찍으려는데
자기 얼굴 찍어도 된다면서 까불거렸다.
[ 진짜? 찍어 줘? ]
[ 농담이지, 초상권 조심해야 돼 ]
우리가 만나지 않았던 5년간, 대충 어떤
사건 사고? 들이 있었는지 서로 풀어놓았다.
그녀는 완전한 전업주부로 살면서 남편, 그리고
새 아들과도 무난하게 잘 지내고 있고
도쿄 올림픽 때 자기도 보란티어를 했었고
자궁에 물혹을 제거했고
코로나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남동생이 자기처럼 이혼하고 재혼을 했다는
짧지만 굵은 내용들을 얘기했다.
나도 대략 크게 있었던 일상의 변화들을 골라
5년간의 내 시간들을 털어놨다.
[ 케이짱 그럼 지금 백수야? ]
[ 백수에 가까운 백수...]
[ 왜 그 좋은 직장을 다 때려치웠어? ]
[ 그냥,, 놀고먹으려고,,]
[ 그래? 그래서 나한테 연락했구나.
같이 놀려고? 맞지? 잘했어. 진짜 너무
반갑고 고마웠어. 연락해 줘서 ]
내년에는 한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 것
같다고 했더니 자기 가족들이 가면 가이드
해 줄 거냐며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꼭 해주라고, 해줘야 된다며 무조건 가겠다면서
약속하라고 다그쳤다.
2월에 갔던 부산에서도 아들과 남편이
아주 좋아했다며 그렇지 않아도 그때 내 얘길
잠깐 했었단다. 같이 공부한 한국인
친구가 있다고 했더니 남편이 당장
연락해 보라고 했는데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연락을 못했다며 그 뒤로 계속
내 생각을 했던 터라 나한테
전화가 왔을 때 정말 기뻤단다.
[ 케이짱이 나,, 많이 도와줬잖아,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 왜 그래.. 갑자기..]
[ 맨날 도움만 받고,, 그래서 내가 먼저
연락하기가 염치가 없었어 ]
[ 그런 말 하지 마..]
그녀의 이혼 과정이 많이 힘들었었고
지금의 남편과도 꽤나 복잡한 속사정 속에서
재혼을 했었다.
그 무렵 심리적으로도 많이 불안해했던
그녀에게 내가 해 준 것이라곤 같이 차를
마시고 그녀 얘기 들어준 것뿐이었다.
막걸리가 두 번째 주전자도 거의 비워질 무렵
잘 구워진 삼겹살을 먹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훌쩍거렸다.
[ 유이!!!, 취했어? 아니면 매워? ]
[ 아니.. 정말 고마워서.. 케이짱..
나,,, 정말 케이짱 만나고 싶었거든,, ]
[ 술 취했네... 그만 마시고,, 주스 마셔 ]
그녀의 잔을 치우려는데 빛의 속도로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낮술부터
시작해 새벽까지 술을 퍼 마셨던 5년 전,
그 어느 날을 끄집어내더니 그때 나눴던
대화가 뭐였으며 옆 테이블 남자들과
술 마셨다던 과거들을
소환해 가면서 즐거워했다.
그녀는 지금 썩 행복하지 않단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고
자신에게 매시간 최면을 걸면서 사니까
훨씬 마음과 생각이 가벼워지더라며
자신을 친구로 생각해 줘서 고맙단다.
일본인 친구들과는 뭔지 모를 벽 같은 게
있는데 내 앞에서는 아무런 꾸밈도 과장도
하지 않는 무방비상태로, 있는 그대로의
본 모습으로 된단다.
[ 유이짱이 그렇게 말해주니 내가 고맙네 ]
[ 아니야,,, 일본인들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기류 같은 게 있거든,, 친구여도,,
어느정도는 감추고, 조금은 과장하기도 하면서
속내를 전부 들어보이지 않아,,근데
케이짱이랑 있으면 마음이 열린다고나할까.
그런 나도 참 이상한데..케이짱 앞에선
내 감정에 많이 솔직해져. 그리고 마음이
편해..꾸미지 않아도 되니까..,,]
[ 내가 일본인이 아니니까 그러겠지 ]
[ 그럴까? 그럼 모든 한국인들이 케이짱처럼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해? ]
[ 음,,친한 사이에선 대부분 그러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일본인들끼리는 친한 사이에도 선을 긋는다면서
그 친한 사이, 또 친구라는 개념이 한국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단다. 일본인에겐 없는
뭔가 인간적인 따뜻함이 느껴지는데
그게 도대체 뭔지 한마디로
압축해서 말하기 힘들다며 단순히
[정]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좀 더
포근함을 느낀다고 했다.
내가 한국인인 게 새삼 고맙고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지금처럼 자기를 만나주길 바란단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그 벽,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이미 생겨나고
있는 게 분명한데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따스함을 느꼈다고 하니 한편으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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