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우린 영화를 같이 봐 왔다. 하지만 지난달
깨달음이 영화 서울의 봄을 혼자 본
후로부터 지금은 각자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보고 있다.
오늘 깨달음은 1947 보스턴을 혼자 보기 위해
신주쿠(新宿)를 나갔다. 집을 나서기 전
나에게 예의상? 같이 볼 거냐고
묻길래 난 사우나를 갈 거라고 했다.
[ 그래? 나도 사우나 좋아하잖아 ]
[ 그럼 당신이 오면 되지.. ]
[ 그럼, 영화 끝나면 바로 갈게 ]
[ 응, 잘 보고 와 ]
결혼하고 14년 동안, 뭘 해도 항상 같이
붙어서 움직이길 원했던 깨달음이 이제 혼자
영화를 보러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깨달음을 보내고 난 목욕용품과 얼음물을
챙겨 천천히 집을 나섰다.
한국은 추석연휴라는데 우린 여기서
전혀 명절 느낌 없이
각자 발길이 이끄는 곳으로 향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올 해 들어 집 근처가 아닌 좀 떨어진
새로운 사우나시설을 찾아다니며
땀을 빼며 즐기고 있다.
암반욕판에 등짝이 서서히 뜨끈뜨끈해져 오면
몸에 긴장감들이 스르르 녹아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아주 좋다.
그렇게 땀 빼고 나와 바나나우유 대신
병우유를 들이켜면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상쾌해진다.
오늘도 변함없이 병우유를 마시며 친구들이
추석 연휴를 잘 지내는지 궁금해 연락을 했다.
[ 전이랑 나물은 안 한지 오래됐지.
아들놈은 친구들이랑 베트남 갔고
나는 남편이랑 둘이서 보쌈 주문해서
맥주 마시면서 넷플릭스 보고 있어, 너는? ]
내가 사우나라고하자 친구도 저녁에
남편이랑 사우나 가야겠다면서
내년쯤에 가족여행으로 일본에 갈 테니
맛집 소개해 달라고 했다.
[ 이제 추석이나 설이면 다들 해외로 나가서
놀아버리니까 명절분위기 여기
한국도 잘 안 나 ]
[ 그렇구나..]
[ 시골이나 그런데는 모르겠는데
서울은 그냥 휴일같은 개념이야. 우리
부부도 시댁은 지난달에 잠깐 갔다 왔고,
친정은 다음 달에 갈 것이고,,]
[ 그렇구나,,]
그렇구나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통화를 끝낸 후 이번에는 노천탕에서
가을볕을 맞으며 몸을 녹였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나고 나서 깨달음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배고프다며 삼겹살이
먹고 싶으니 늘 가던 곳에서 보자고 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깨달음은 막걸리를
한 병 혼자서 콩나물을 안주삼아
거의 다 비우고 있었다.
[ 영화, 재밌었어? ]
[ 응, 너무 좋았어. 혼자 몰래 울어서
배가 갑자기 고픈 거야 ]
[ 울었어? ]
[ 응,, 너무 감동적이어서..]
[ ........................ ]
뭐가 감동적이냐고 묻지 않았지만
깨달음은 리얼하게 전반적인 스토리와
감동씬을 설명하며 또 울먹거렸다.
손기정 선수 덕분에 돈이 모아져서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고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일장기를 가렸던
그 심정이 아프게 다가왔고,,등등
[ 많이 울었어? ]
[ 응,,, 계속 감동적이었거든,,]
두툼한 삼겹살이 익는 동안 깨달음은
계속해서 영화 얘기를 하며 그 시절
너무도 많은 사건, 사연들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았다며 자기 취향에 딱 맞는 영화라고 했다.
정말 배가 고팠는지 고기를 된장만 발라
정신없이 입에 넣는 깨달음을 보면서
직원분에게 1인분 추가를 부탁하는데
깨달음이 냉면도 먹고 싶다고 했다.
[ 먹어,,]
[ 된장찌개도 먹고 싶은데.. ]
[ 집에서 늘 해 먹는 건 주문하지 말랬지 ]
[ 집 된장찌개랑 가게 된장찌개랑은
맛이 다르잖아 ]
[ 그래.. 알았어, 그럼 주문해 ]
깨달음이 고기를 거의 다 먹고
난 볶은밥을 먹고 있는데 메뉴판을 한 번
보고 내 얼굴을 한 번 또 보더니 냉면을 시켰다.
[ 된장찌개 먹어,, 괜찮아 ]
[ 아니,, 고기를 1인분 더 시켜서
그 고기 구워지면 냉면이랑 먹으려고 ]
[ 그래,, 그렇게 해..]
냉면 한 입 먹어보라는 소리 없이 열심히
삼겹살 돌돌 말아먹는 걸 보고 물었다.
[ 깨달음, 한국은 추석인 거 알지? ]
[ 알지, 당연히, 집에 가서 어머님께
전화해야지 ]
[ 원래부터 전화할 생각이었어? ]
[ 그럼,, 내가 수첩에 적어놨지 ]
[ 그래?.. 할 말도 생각해 뒀어? ]
[ 그럼,, 항상 하는 말 하면 되잖아, 어머니,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건강하세요 ]
[ .......................... ]
아주 솔직히 말하면 난,,오늘 추석 분위기를
내고 싶어 장을 봐 추석상을 차려볼까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데 이렇게 삼겹살에 막걸리로 깨달음과
대만족 할 수 있고 각자 취미생활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으니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한국에서도 자꾸만 옅어져 간다는
명절의 의미를 타국이지만 조금이나마
느껴보려고 했는데 그냥 이렇게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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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러분들은 가족분들 만나
풍성하고 행복한 한가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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