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에서부터 화환이 즐비했다.
깨달음 회사와 아주 가까운 거래처는 아닌데
시박회를 원하는 초대장을 받았다.
7월 말, 홋카이도 시박회를 깨달음의 입원으로 인해
가지 못했는데 계획에 없던 외박이 되었다.
장소가 긴쟈(銀座)인만큼 분위기는 조금 남달랐다.
카운터에는 호텔 관계자가 모여서 회의인 듯,
술자리인듯 가볍게 술을 한잔씩 하면서
시공단계와 완공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길 나누고 있었다.
각 층마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오픈룸에서 들어가 센치를 확인하기도 하고
깨달음은 분주했다.
난 늘 이렇게 시박회에 올 때마다
건축적인면은 몰라서 어떻게 평가를 해야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있다.
[ 깨달음, 이 앙케이트 내일
체크아웃할 때 제출하면 되는 거지?]
[ 응, 근데 내일 아침식사를 하면서
음식 메뉴의 다양성과 맛, 상태.
조합, 음료, 테이블까지의 이동거리에서
파악되는 불편함,,등도 봐야 할 거야 ]
[ 알았어.조금은 엄한 잣대로 봐도 되는 거지?]
[ 응, 그러라고 시박회를 하는 거야.
정작 시공사나 관계자들은 눈에 익어서
못 보고 지나친 것,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을
잡아내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투숙객 입장에서 봤을 때 느끼는 것을
아주 솔직하고 리얼하게 그냥 있는 그대로
쓰면 돼, 미적, 디자인적인 감각으로 봐도 좋고,
각양각색의 투숙객이 있으니까 보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잖아,그 중 한사람이
되어서 편하게 표현하면 돼]
그렇게 말을 하던 깨달음이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적기 시작했다.
[ 벌써 적어? ]
[ 응 잊기 전에 눈에 띈 것은 바로 적어야 돼 ]
뭐라고 적나 지켜봤더니 TV위치가 너무 높다.
침대 사이에 보조 테이블이 필요하다.
샤워실에 타월이 너무 길게 나와 있다. 등등
술술 계속해서 써내려가다 다시 다른
오픈 룸으로 가서는 배치된 가구들을
흔들기도 하고 가방을 올려보았다.
[ 베개의 높이, 당신은 어때? 이불 감촉은? ]
오늘은 다른날과 다르게 좀 더 세밀하게
보는 거 아니냐고 물으니까 자기 회사와는
거래가 아직 한번도 없었는데 이렇게
의뢰를 받았으니 성심성의껏 좀 더
신경을 쓰고 싶다고 했다.
깨달음은 예리한 건축가의 눈으로 하나하나
빠트리지 않고 구석구석 하고 싶은 얘기들을
찾아내 방에 들어와 바로 사진들을
비교해가면서 또 적어내려갔다.
난 내 나름대로 느낀 점을 몇 가지 적어넣으며
우린 조용히 숙제를 하듯 앙케이트에
답을 하는데 집중했다.
아침식사평은 일단 남겨두고
거리로 나와 칵테일을 한잔씩 나누며
추석연휴에 각자 하고 싶은 일은 뭔지,
얘길 나누기도 하고 9월 중순에 출산예정인
조카의 출산용품 얘기를 했다.
깨달음이 우린 언제 한국 또 갈거냐고 물었다.
[ 생각해보니까 예정일에 맞추는 것보다는
낳고 난 다음에 좀 차분해지면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산후조리를 어느정도
끝내고 난 후에.. ]
[ 그 말도 맞네, 그럼 며칠날 갈까? ]
내가 카렌다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뭔가 메모를 했다.
아까 호텔에서 못 적었던 조명의 밝기에
관한 게 떠올랐다면서..
[ 깨달음, 너무 열심히 하는 것 같애 ]
[ 시박회도 일의 연장선이야, 그래서
빈틈없이 하려는 것뿐이야 ]
[ 알아, 그래도 쉬엄쉬엄 해 ]
실은 이번주 토요일 깨달음은 또 수술을 한다.
지난번에 제거하지 못한 스텐트를 꺼내고
아직 남아있는 결석을 배출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 상담을 해야한다.
나 역시 이곳에 놀러 온 건 아니지만 깨달음은
회사 일과 관련되면 건축가 모습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 같다.
그게 당연한 것이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지만
몸상태가 그리 양호하지 않아서
보는 나는 걱정이다.
[ 당신은 온전히 자신을 위한 시간을
언제 갖는 것 같애?]
[ 주말에 쉬잖아, 늦잠도 자고, 그게 휴식이지]
주말에 쉰다고 해도 집에서 틈만 나면
도면 체크하고 팩스보내서 직원들에게
메일을 주고 받는 시간이 많다.
[ 좀 쉬면서 해. 이젠 이런 말도 안할거야 ]
[ 한국에 가서 또 재밌게 놀려고 여기서
열심히 일하는 거야. 그니까 걱정말고
내일 바로 티켓 예약해 줘]
[ ......................... ]
깨달음은 엊그제 내가 올린 글에 대해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https://keijapan.tistory.com/1285
(나는 일본에 사는 한국인이다)
또한 한일관계가 더 시끄럽게 얽히고
꼬여가고 있는데 마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흔들림없이
마음의 동요조차 없다. 일에 빠져 있을 때의
깨달음과 한국에서의 깨달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분명하다. 이런 깨달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내가 미처
몰랐던 삶의 방식이 있음을 느낀다.
나도 꽤나 선긋기가 분명한 사람이라 듣는데
깨달음이 보여주는 선긋기는 언제나
나보다 한수 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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