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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

내 솔직한 고백

by 일본의 케이 2025.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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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척의 결혼식이 있었다.

큰집네와는 상당히 가까운 관계를

형성해 온 덕분에 친지가족들이 모두

큰집 조차의 첫 결혼을 축하했다고 한다.

난 이번에도 참석을 못하고 카톡으로만 

현장의 분위기를 느꼈다.

내가 자매단체톡에 메시지를 보낸 이유는

엄마 때문이었다.

지난주,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내게 보고 싶다고

언제 한국에 올 거냐고 하셨다. 좀처럼 그런 말씀을

안 하시는데  기다리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4월 말에 갔다 왔으니 다시 간다고 해도

11월쯤이나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뒀던 터라

여름 지나고 선선해지면 갈 거라고만 답했다.   

 

엄마랑 통화를 끝내고 동생과도 꽤 긴 시간

요즘 엄마의 상태에 관한 얘기를 나눴었다.

날이 갈수록 가까이 자식이 없다는 게

불안하신지 예전과 다르게

외로워하시고 의지하시려 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우리 시아버지도 움직이면

돈 든다고 도쿄에서 나고야까지 교통비가

비싸니까 자주 오지 말라고 늘 그러셨는데

요양원에 들어가고 조금 지나면서부터는

언제 또 올 거냐고 묻는

횟수가 잦아졌었다. 

지난번 광주에 갔을 때 엄마 침대 머리맡에 

놓인 작은 박스를 무심코 열어봤었다.

동생이 알기 쉽게 적어둔 카톡 사진

보내는 방법과 음성 보내기가 적힌 종이와

손자, 손녀, 증손자, 그리도 당신 자식들

사진들이 두서없이 섞여있었다.

왜 이런 걸 머리맡에 두고 있냐고 했더니

잠이 안 올 때 한 장씩 꺼내보면서 

옛날 있었던 추억들을 회상하신다고 했다.

[ 엄마,, 많이 외로워? ]

[ 그러지... 아무도 없응께..딸들이

다 서울에서 살고.. 너는 외국에 있고...]

[ 누가 근처에라도 살았으면 좋겠어? ]

[ 그러믄,,제일 좋제..근디..그럴수가 없잖냐

다들,,지기들 인생이 있응께 ]

 

사진을 뒤적이다 눈에 띈 사진 한 장,

유학생활 3년째 되던 해였나,,

아빠와 엄마를 모시고 여동생 내외가 

처음으로 일본을 놀러 왔을 때 하코네에서

찍었던 사진이었다.

처음 본 사진이어서 정작 본인인 나는 너무

생경하고 어색해했더니 옆에 있던 엄마가

이때가 당신도 젊고 나도 젊어서 좋을 때였다고 

60살이 넘으면서부터는 1년이 지나가는 게

금방이구나 했더니 70살이  되고 보니 한 달이 

일주일처럼 흘러가고 80이 됐더니 한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더라고,,

가는 세월 잡을 수만 있다면 딱 10년만

아니, 5년만이라도 잡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셨다.

[ 5년 젊어지면 뭐 하고 싶은데? ]

[ 꼭 하고 싶은 것은 없는디..몸이 5년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거여,,90이 코 앞이어서인지

눈도 더 침침해지고 허리도 꼬부라져서

키도 작아지고 옛날에는 등산도 잘 다녔는디

인자 좀 만 많이 걸어도 숨이 차고,,그런께

쬠만 젊으믄,,,5년전에만해도 이러지

않았거든,,근디 인자는 몸이 점점 말을

안 들어서 어디를 갈라고 해도 자신이 없어,,

행여나 넘어지고 자빠져서 뼈라도 뿌러지믄,

바로 요양원으로 가야한께 그게 서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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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양원도 좋은데 많아,,,]

[ 일단, 요양원에 들어가믄, 살았다 할 것이 아니여 ]

[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좋은데 많다니깐 ]

[ 아니여,, 아무리 좋아도 내 집만 하것냐? ]

[ 그러긴 하지..] 

사진들 모퉁이 누런 봉투 속에서는

엄마 증명사진이 나오길래

왜 찍은 거냐고 물었더니

작년에 여권 만들면서 찍어둔 거라고

젊게 나왔으니 영정 사진으로 쓰라고 하셨다.

 

[ 큰 언니 청첩장은 이렇게 종이였구나,,,]

[ 응,, 내가 큰 딸을 보내면서 많이 울었다..

그래서,,이 것을 못 버리것드라..]

1986년에 결혼을 시켰으니 40년 되어 가는

이 얇은 종이 청첩장을 열어 볼 때마다

혼수를 많이 준비 못한 채로  딸을 시집보내면서

내내 가슴이 아팠다는 그날을 상기하며

큰 딸에게 미안해하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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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방앗간에서 그날 직접 짜 온 참기름을

가방에 넣고 식사를 하러 갔을 때

엄마는 인생 긴 것 같아도 살아보니 상당히

짤더라며 쉰 살을 넘기면부터는 내리막이니까

하루하루 즐겁게 살라며 싸울 것도

슬퍼할 것도 없이 남들 생각하지 말고

깨서방이랑 둘이서 신나게 멋지게 원 없이 재밌게

살아라고 그래야 후회가 없다는 말을

몇 번이고 강조했었다. 

 

한국의 가족과 3년만에 만난 남편

김포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타려는데 깨달음이 지하철을 타고 싶다고 했다. 3년의 공백이 있었으니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도 구경? 하고 오랜만에 한국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30분이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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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부른 한국 노래의 진심

추석연휴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말 그대로 휴식을 취했다. 늦더위가 사람을 지치게 한 탓인지 우린 연휴라지만 무언가를 할 의욕마저 상실해 버린 것처럼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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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엄마랑 헤어지면서도 우린 거짓 약속을

했다. 금방 곧 또 오겠다고,,,

연로하신 노인을 홀로 두고 떠나 오는 자식들

마음을 엄마는 모르실 게다.

가까이서 돌 볼 수 없음을, 쉬이 갈 수 없음을

일일이 설명드릴 수 없어서도 죄송하고

내 살 길이 우선이고 내 인생이 먼저이기에

부모가 일 순위가 못 되고 있음에 송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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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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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다섯이면 뭐 하고 열이면 뭐 하겠나,,

옆에서 지켜보고 보살피는 자식이 없는데..

내일모레면 90이 되시는 홀어머니를

더 이상 외롭지 않게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가득한데 이놈의 현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쩌면 난 지금에 이  현실 속에 숨어서

 엄마 곁에 못 가는 이유와 핑계들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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