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위에 노란 봉투가 놓여있었다.
늘 같은 봉투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분
뿐이기에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깨달음 회사 담당 세무사(税理士)인
노야마(野山)상이 보내온 것이다.
깨달음이 회사를 창립하고부터
지금까지 세무 일을 맡아주시고
우리 부부의 자산관리까지 해주셨기
때문에 어찌 보면 속속들이 속사정을
잘 알고 계신 분이다.
[ 깨달음, 노야마 상, 이번에도
아무 연락 없이 잠수 탔었어? ]
[ 응, 늘 그러니까.. 또 입원을 한 건지..
근데 이렇게 사과편지 보낸 거 보면
아직까진 괜찮다는 소리겠지 ]
[ 난치병이라고 그랬지? ]
[ 응,,]
나와도 몇 번 식사를 한 적이 있던 노야마 상.
지병이 악화되기 시작되던 3년 전부터
일처리가 미뤄질 때마다 사과하는 마음에서
편지와 상품권을 보내셨다.
[ 노야마 상한테 이제 이런 거 안 보내도
된다고 그러지.. ]
[ 말해도 안 들어. 미안해서 그러겠지.
또 한 달 이상 연락 안 될 걸..이번에도 ]
깨달음 회사뿐만이 아닌 여러 곳을 맡아하는데
자꾸만 일처리가 늦어지자 세무서를
바꿔버린 곳이 많았지만 깨달음은 의리로
지금까지 함께 해왔다고 한다.
[ 지난번엔 백화점 상품권이었는데
이번에는 편의점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 좋네 ]
[ 번갈아서 보내는 걸 보니까 다음엔
백화점 상품권 보낼 걸 ]
상품권을 지갑에 넣으며 마침 살 게 있었는데
잘 됐다는 얘기를 나눴었다.
그런데 오늘, 사망했다는 카톡을 받았다.
사무실에 쓰러져 있는 걸 직원이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자살이나 타살이 아닌
자연사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퇴근하고 우린 이자카야에서 만났다.
사무실 주변에 설치된 카메라로 행적을
조사해봤더니 사망 추정되는 날이
나에게 상품권을 보낸 다음날이라고 했다.
직원도 날마다 출근하는 게 아니라서
바로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 사무실 입구에 쓰러져 있었대 ]
[ 퇴근하려다가 그랬을까.. ]
[ 직원도 3일 만에 출근을 한 거래 ]
[ 어머.. 어떡해..]
[ 장례식에 가야겠네..]
[ 근데.. 장례를 치를 사람이 없어서
지금 그 직원이 여기저기 연락을 하는 것
같더라고 ]
노야마 상은 재일동포이다.
누님과 단 둘이 살았는데 2년 전,
누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살다 돌아가셨으니
아마도 조카들이 정리를 해야 하지 않겠냐며
결혼도 하지 않고, 오직 일만 하고 살았던
노야마 상이 그렇게 사무실에서
마지막을 보내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단다.
[ 우리한테 상품권 보낼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는 거잖아.. 근데.. 다음날,,]
[ 원래 난병이었으니까.. 언제 그렇게 될지
본인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겠지 ]
[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잖아,,]
[ 하긴, 나도 안 믿기더라고 ,,
참 허무해..]
[ 그니까,,너무 황망하다...]
깨달음은 노야마 상 사무실에서 독립해 나온
여직원과 통화를 했다며 자기 회사 세무는
앞으로 그녀에게 맡기는 걸로 했단다.
[ 6년 전쯤? 그때 만났을 때 소녀시대
태연을 좋아한다고 전주에 가서
비빔밥도 먹고 태연이 졸업한 학교도
가보고 싶다고 그랬는데...]
[ 그랬지..]
[ 한국어도 참 잘 쓰셨는데.]
[ 재일동포니까.. 근데 주변에서는
노야마 상이 재일동포인지 모른 사람이
더 많았어, 지난번에 거래처 사장 아들,
결혼식 때, 한국어로 스피치 하는데
사람들이 다 놀랬어 ]
[ 자신이 재일동포인 걸 밝히지 않았나 봐]
[ 안 밝히는 게 일 하기 편하니까 그랬겠지 ]
나는 내 지갑에 넣어둔 상품권을 꺼내
깨달음에게 건네며 당신이 40년이
넘도록 노야마 상이랑 친했으니까
당신이 쓰는 게 맞는 거 같다고 했더니 자기
지갑에 넣으면서 49재까지 간직하겠단다.
어제 살아 숨 쉬던 사람이.오늘은 차디찬
주검으로 나타나고,,언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게
인간의 삶과 죽음이 아니가 싶었다.
우린 사람 목숨이, 그리고 죽음이라는 게
얼마나 우리 곁에 찰나처럼 순간순간
도사리고 있는지 얘기 나누다 갑자기
이태원 참사도 잠시 꺼냈다가 아무튼,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열심히,
그리고 감사하며 살아가자고 약속하고
노야마 상이 아프지 않은 곳에서
편히 쉴 수 있길 바라며
마지막 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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