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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

엄마를 부탁해-1

by 일본의 케이 2015.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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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지난 주 엄마 생신날 통화하고 일주일 만이다.

 뭐하시냐고 물었더니 그냥 테레비 보고 계신단다.

건강은 어떠신지, 뭐 드셨는지, 감기 조심하라고,

그리고 차 조심하시라고,,,늘 전화해서 하는 소린 같다.

엄마에게 전화할 때면 되도록 깨서방이 있을 때 해서

깨서방 목소리도 들을 수 있게 하는데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하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후배가 주고 간 영화 [ 님아 저 강을 건너지 마오 ]의 영상들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돌아가신 우리 아빠가 떠오르기도 하고,,,홀로 남은 할머니..

홀로 계신 우리 엄마가 눈에 자꾸 어른거려

 그냥 무작정 전화를 걸었던 것 같다.

전화통화를 했지만 영화의 잔영 때문인지

왠지모를 애달픔과 죄책감에 기분이 착찹해져 왔다.

그래서 지난 구정 때, 내 카메라 속에 담았던 엄마의 일상들을 열어 보았다.

엄마방, TV앞에 놓여있는 엄마 전용 공부밥상에는 성경책과

깨서방이 보내 준 스도쿠풀이, 그리고 가계부가 놓여 있다.

 

한글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지만 착실하게 매일 매일

가계부를 적고 계시는 우리 엄마.

극장도 가시고, 시장에서 뭘 사셨으며, 헌금은 얼마를 내셨는지...

맞춤법이 엉망이지만 한 눈에 엄마가 보내신

한 달을 엿 볼 수 있다. 

한국에 올 때마다 난 엄마 몰래 이렇게 엄마의 가계부를 체크하는 버릇이 생겼다.

웬지 엄마 가계부를 보면 가슴이 시려오지만

자식들이 없는 동안 혼자서 뭘 하고 지내셨는지,,,

뭘 드시고 지내셨는지 궁금해서이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던 알파벳 연습장도 발견했다.

철 지난 달력에 A.B.C.D를 반복해서 써 놓으셨길래 물었다.

왜 알파벳을 외우셨냐고,,,

세상 모든 물건들이 영어로 써져 있어서

뭐하나 살려고 해도 도통 알 수가 없고 특히 사이즈를 고를 때도 힘들더라고

 그래서 외워야 할 것 같아서 쓰면서 외웠는데

 아직도 헷갈린다고 늙어서 머릿속에 안 들어간다고 하셨다.

[ 다시 태어나믄, 원 없이 나도 공부잔 좀 해 봤으믄 쓰것다.

영어도 해보고, 유학도 가보고, 멋진 여자로 살고 싶으다]라시며

쑥스럽게 웃으시던 우리 엄마.. 

알파벳 하나 하나 적으시며 외우신 그 열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구정날은 마늘을 꺼내려고 김치 냉장고를 열었다가

웃음이 나와 사진을 찍었더니

별 것을 사진으로 찍는다고 한글 못 쓴다고 동네방네 소문 낼 일 있냐고

 챙피하다고 어여 닫아라고 싫은 소릴 하셨다. 

무군갓지(묵은 갓김치),찍거리 김치(찌꺼기 김치)...

웬 찌꺼기 김치냐고 물었더니 먹다 남거나, 어설프게 익은 맛없는 김치들을

김찌찌개용으로 쓸려고 넣어 둔 김치라고 하셨다.

동생이 다시 좋게 써 드리겠다고 뜯으려고 하자

당신만 알아 먹으면 된다고 뜯지도 말고

더 이상 묻지도 말고 닫아라고 야단을 치셨다.

 

볕이 좋은 날은 호박이며, 가지며, 도라지며, 무우며,,,,

  뭐든지 꼬들꼬들 말려 큰 딸네, 작은 딸네, 아들네, 막내 딸네

그리고 일본에 있는 내 몫까지 챙기시니라 늘 바쁘신 것 같았다.

 

평일은 이렇게 성경책을 읽으시다가,,,스도쿠풀이를 하시다가,,,

잠자리에 들기전에 가계부를 적고 하루를 마감하신다고 했다.

수요일, 일요일이면 교회에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만

그 외의 날은 그냥 집에서 테레비가 친구라고 조금은 쓸쓸하게 말씀하셨다.

 

지난해 한국에 갔을 때부터 엄마는 이런 말씀 하셨다.

[ 나 죽고 나면, 인자 광주까지 내려 올 일도 없을 것이다...]

 죽고 나면 이 아파트 처분해서 아들한테 주고

나는 니기 아버지 옆으로(추모관) 가믄 된께,

제사고 뭐시고 지낼라고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어야~

교인들은 제사 같은 거 필요없응께, 각자 제 자리에서

기도만 해도 다 통한께 그냥 그렇게해라잉~

 여기까지(광주) 와 봤짜 따뜻한 밥 한끼 해주는 사람도 

그 때는 없을 것이다.. 요 집 자체가 없어져분께~ ]

[ .......................... ]

난 작은 목소리로

 [ 그러네,,, 엄마 안 계시면 여기까지

올 일이 별로 없을 것 같기는 하네.,,]라고 얼버무렸다.

오빠를 빼놓고 자식들 모두 서울에서 살고 있으니

 어찌보면 엄마 말씀이 옳은지도 모른다.

아까 전화통화를 하면서

요즘은 100살까지 사시는 분들도 많더라고,

그러니 엄마도 100살까지 사시라고 그랬더니

너무 오래 살아도 자식들에게 못할 일만 시키고

남들도 욕한다고 갈 때 되면 조용히 바로 가는 게

최고라고 그러셨다.

내년이면 팔순을 맞이하는 우리 엄마...

해외여행, 크루즈 여행을 가자는 얘기가 나오긴 했지만

그것보다 엄마가 진정 원하는 건, 가까이 자식이 한 명이라도 있어

자주 찾아 뵙고 돌보아 드리는 것일 것이다.

살아계시는 동안, 옆에 계시는 동안

더 찾아 뵙고, 더 잘 해드려야하는데 알면서도 멀리있다는 이유로

 외면했었고, 조금은 눈을 감았던 부분이 있었음을 시인한다.

내 스스로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않냐는

 어설픈 변명을 하며 형제들에게 엄마를 부탁했었다.

그 알량한 이유를 언제까지 내밀며 내가 해야할 몫까지

언니, 오빠, 동생에게 맡길 것인가.....

엄마가 100살까지, 아니 90살까지 사시도록 내가 잘 해야하는데.....

살아 계실 때 잘해야지.... 정말 살아 계실 때 잘해야지...

애가 타고 애가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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