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나간지도 모르게 깨달음은 조용히
출장을 떠났고 오전 일을 마친 난
점심시간을 이용해 병원으로 향했다.
6월에 해야하는 정기검진을 미루고 미루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예약을 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좋은 생각만 하자고 다짐하며 다독여도
좀처럼 기분은 개운해지지 않았다.
정기검진을 받는 게 그냥 싫었다.
뭐가 싫었냐고 묻는다면
딱히 그 이유를 끄집어 낼 수 없지만 그냥
검진을 하러 가기가 싫었다.
왜 이제서야 왔냐고 캐물어볼 간호사에게
적당히 둘러댈만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고
초음파를 하기 위해 온 몸에 발라대는
투명하고 미지근한 젤리액도 싫고,
체혈을 몇 봉이나 해야한다는 것도 싫었고
환자들 가득한 대기실 속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잡지를 뒤적이며 내 이름이 불리워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도 싫고,
행여나 수치가 좋지 않게 나와서
뭔가 치료를 다시해야할지 모른다는 말을
들을까봐 걱정되서 싫고,,그냥 다 싫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뤘다.
모든 이유같지 않는 이유들을 내세우며
병원 가는 걸 멀리했다. 하지만 와야했기에,
아니 더 이상 미룰 수 없기에
대기번호를 받고 기다렸다.
(야후에서 퍼 온 이미지)
하필 오늘은 독감 예방접종을 하러 온 사람들로
대기실에 앉을 자리가 없었고
예약은 했지만 1시간이 넘도록 내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자 간호사가 두어번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갔다.
드디어 내 차례,,채혈을 하고, 초음파를 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듣고 나왔다.
그 일주일간 난 검사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신경을 바짝 세우며 지낼 것이다.
솔직히 이 초조한 기다림이 싫어서
미뤘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침대에 누워 책을 펼쳤다.
무언가 몰두하고 싶을 때마다 펼치는 책을 들고
몇 페이지 읽다가 벌떡 일어나 주방에 나가
앞치마를 두르고 냉장고에 있는
야채들을 죄다 꺼냈다.
다음주를 위해 몇가지 만들어 두어야할
반찬거리가 갑자기 생각났던 것이다.
그 때, 마침 깨달음에게서 저녁 스케쥴을
어떻게 할 건지 묻는 카톡이 왔다.
[ 병원에서 뭐래? ]
[ 다음주에 결과 나온다고 그랬어 ]
[ 그럼 지금 뭐하고 있어? ]
[ 응,,반찬 좀 하려고, 다음주에 시간이 없어서 ]
[ 안 피곤해? ]
[ 괜찮아 ]
[ 저녁에 맛있는 거 먹을까? ]
[ 뭐 먹을 건데? ]
[ 피를 뺐으니까 보충해야지, 고기 먹자 ]
[ 알았어 ]
신칸센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깨달음이
양 손에 들고 나온 쇼핑백을 내게 주고는
배고프다며 빨리 먹으러 가자고 서두른다.
출장지에서 직원들과 있었던 작은 트러블을
내게 고자질 하듯 풀어내는 깨달음의
얘기를 들으며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 다음주에 결과 나오는 거야? ]
[ 응 ]
[ 늘 하던 건데 왜 이번에는 검진을
안 하려고 했어? ]
[ 그냥,,]
내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다시 묻는다.
[ 안 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 왜 싫었어? ]
[ 그냥,, ]
[ 아프지 말고 행복하기로 했잖아 ]
[ 알아, 나 안 아파 ]
[ 근데 왜 병원 가기 싫은 거야? ]
[ 몰라,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상황도 싫고,
그래서 계속 병원을 가야한다는 것도
그냥 짜증났어, 안 가도 될 것 같고,,]
[ 안 가면 안 되잖아 ]
[ 알아,,알고 있어.그래서 오늘 갔잖아 ]
[ 아프면 당신만 힘들어..,내가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
[ 알아,,안 아플거야,괜찮아 ]
깨달음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평양식 냉면이라고
나온 냉면을 후루룩 몇 번 먹다가 전혀 평양맛이
아니라며 나한테 맛을 보라고 냉면 그릇을 밀고
내 삼계탕을 자기쪽으로 가져갔다.
[ 먹어 봐, 한국식도 아니고 일본식이지? ]
[ 응,,,일본인 입맛에 맞춘 맛이네..]
[ 역시, 냉면은 농x 둥지냉면이 최고야 ]
[ ....................... ]
집에 돌아와 깨달음은 피곤하다며 일찍 잠이 들었다.
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정리를 하고
내일 필요한 것들도 가방에 넣은 뒤
일기장을 꺼냈다. 블로그에 차마
적지 못했던 내 병원일지를
오랜만에 읽어보았다.
항암 부작용으로 전혀 음식을 먹을 수 없었을 때
썼던 내용들은 지금 읽어봐도
너무 처절해서 몸서리가 쳐진다.
그렇게 버티며 이겨냈으니 이제는 관리만
잘 하면 되는데 자꾸만 답답함에 화가
치미는 건 무엇때문일까..
언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재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끌어 안고 사는 불안함이
지겨워진 것일까..,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지고 피골이 상접해져가는
나를 보면서 먹을 수만 있다면,
단 하루라도 잠을 편히 잘 수만 있다면,
아프지만 않는다면, 아니 낫기만 한다면 뭐든지
할 거라고 다짐하고 다짐 했건만 요즘에 난
자꾸만 방전된 인형처럼 축축쳐져 가고 있다.
이렇게 정신상태가 혼란스러운 건
갱년기의 끝자락인 것도 하나의 요인일 거라
나름 분석해 보지만, 분명한 건
100%완치라는 말을 간절히 듣고
싶어서인 것 같다.
그 말을 듣기 위해서 난 얼마나 더 많은 노력을
해야하며 얼마나 더 기다림 속에 있어야할까..
오늘까지만 지치고 아파하자..
나 보다 더 힘든 상황에 계시는 분들,
여전히 치료중이신 분들이
훨씬 많으니 지금의 나를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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