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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신랑(깨달음)

한국을 좋아한 이유가 따로 있었네..

by 일본의 케이 2014.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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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이 책 한 권을 주셨다.

내가 아닌 깨서방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이라며 건네 주셨다. 

1970,80년대, 한국인들의 일상을 일본인이 카메라로 담은 사진집이였다.

[7080 지나간 우리의 일상]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더니 첫마디가 [양반이다~]였다.

내가 70,80년대는 양반/쌍놈 구별이 없었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때 당시 한복을 곱게 입고 다니신 분들은 양반집안이 틀림없다고 자기가 장담한단다

자기가 1985년도 한국에 처음 갔을 때도 가끔 길거리에서

아줌마들은 치마저고리를, 아저씨들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계신 걸 봤다고

흰 백색의 자태가 참 보기 좋았다며

그 당시 말로만 듣던 한복을 직접 보니까 신기하기만 했다고 감회에 젖는다.

 

뜨거운 연탄불 위에서 띠기, 달고나를 했던 것도 자기 어릴적 모습과 너무도 똑같다고

자기도 막대를 빨아 먹고 그랬다며 이 군것질을 한 번 하기 위해

용돈을 아끼고 아꼈던  어린시절 얘기를 옆에서 보고 있는 나에게 해준다.

 

작품 하나 하나에 타이틀은 달려 있지 않았다.

사진을 찍은 장소, 주위 배경들이 짤막하게 한국어로 기재 되어 있어서인지

 깨달음이 자기 맘대로 타이틀을 정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 아리랑, 아리랑 ] 

 

이 작품은[ 양반의 나들이]

 

다음은 사진은 [ 기분 좋은 날]

 

이 작품은 [ 남과 여 ]

 

이 작품은 [ 같이, 같이..]

 

그리고 깨달음이 제일 맘에 든다고 [어머니와 딸]이라는 타이틀을 넣은 사진.

근데 왜 사진들을 보고 있으니까 눈물이 날려고 한다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어서인지 가슴이 찡해 온단다.

깨달음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전반까지 3달에 한 번정도 한국에 갔었단다.

한국의 건축양식을 연구,분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기도 했었고

교수님 논문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위해 초가집을 찾으러 다니기도 했다며

뭐니뭐니해도 한국 사람들의 순박함과 정이 넘쳐났던 시대였단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러 가면 말도 안 통하는 자기팀에게

 안주를 시켜주기도 하고 그쪽 테이블에 있는 안주를 먹어보라고 권하기도 하고

말없이 막걸리를 한 병 자기테이블에 올려주시기도 했단다.

그러면 자기네도 미안해서 서로 주고 받다 하다보면 새벽까지 술을 마시게 되고

헤어지기 전에 해장국집까지 같이 가서 바디랭귀지를 해가며 많은 얘길 나누곤 했단다.

호텔 앞엔 군밤 파는 아저씨, 오징어 파는 리어커 상인들이 밤 늦게까지 장사를 했었고

 아침마다 군밤을 사는 자길 기억하곤 옆에 오징어 아저씨가

쥐포도 한 마디 구워주고 그랬다고,,,,

그 때는 사람과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 넘쳐났다고,,,

말은 안 통해도 정이 통했던 시절이였고,,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정이 넘쳐났던 시절이였다고,,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졌던 70,80년대였다고,,,,,

그런데 지금에 한국은 그런 정문화가 많이 없어져버렸다고

자기는 예전에 따뜻한 한국을 체험하고, 경험한 사람이기에 

한국이 차가워져가고 있음을 바로 느낄 수 있단다.

 

 30년 전의 한국은 이제 찾아 볼 수 없지만 그래도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인간미, 우리라는 문화는 변함이 없어 다행이라면서

타이머신이 있으면 다시 그 70,80년대로 한 번만 돌아가 보고 싶단다.

깨달음 얘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우리 삼촌들 젊었을 때 얘길 듣는 듯하다.

일본인이 하는 얘기라고 믿겨지지 않을만큼 리얼하고 감상적이다.

지금도 변함없이 깨달음이 한국을 좋아하는 것은 그 때, 그 시절

느꼈던 한국, 한국인에게 받은 훈훈한 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인지 모른다.

진짜 타이머신이 있으면 태워 주고 싶어진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깨달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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