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우편함에 들어있는 소포상자를 꺼내
깨달음 방에 두었다.
서방님에게서 온 것이었는데 묵직한 게
두꺼운 책이 들어있는 느낌이였다.
그렇지 않아도 서방님이 지난주 깨달음에게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들어놓았던 보험 증서를
회사로 보내왔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회사가 아닌 집으로 뭘 보낸 건지 약간
궁금하기도 했지만 시댁일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던 터라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퇴근하고 돌아온 깨달음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난 할 일이 있어 내 방에서
파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일을 그만두어도 직책만 없어질 뿐
보란티어로 앞으로도 얼굴은 계속 보고
지내야 하기 때문에 마무리도 깔끔하게
뒷정리를 해야 했다.
내가 원하고 노력해서 쓰게 되는 감투는
감사하지만 어쩌다 보니 얻게 된 감투는
늘 내 옷이 아닌 듯 불편했었다.
내 노력에 비해 댓가가 너무 커서 부담스러웠고
남들은 부러워하는 자리였지만 난
심리적으로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초심을 되찾고 싶다는 말로 예쁘게
포장을 씌워 모든 걸 내려놓기로 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난 점점
감정이 메말라가는지 아주 사무적이고
의무적인 딱딱한 인간이 되어가는 듯싶어
나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몇 번 찾아오겠지만
난 이번 기회를 노년을 새롭게 만들어 가기위한
좋은 시간이 될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막연한 이상이 아닌 좀 더 구체적이고
체계화 된 노후 설계를 위한 것이기에
퇴사결정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저녁 9시경, 다시 거실로 나갔는데
깨달음이 안경을 쓰고 뭔가를 보고 있었다.
힐끗 보니 통장이 보이는데 시어머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서방님이 보낸 게
시부모님의 통장이랑 입출내역서였던 것 같다.
[ 이번에도 첫 통장은 안 보내고
잔액만 남은 통장을 보냈네..]
깨달음이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 서방님은 예전에도 그랬잖아 ]
[ 내가 작년 11월부터 보내라 그랬는데
하도 안 보내길래, 재산이 얼마 남았든 모두
너 다 가지라고, 손 안 될 테니까 일단
통장이랑 내역서 보내라고 했더니 또 중요한
통장은 빼놓고 입출금 내역도 앞부분이 없어 ]
[ 깨달음,, 나한테 얘기하지 말아 줘.
두 형제가 알아서 하라고 했잖아,, ]
[ 근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이 자식이
왜 이렇게 돈에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네 ]
부모님 재산에 손대지 않겠다고 했더니 이제야
통장을 보냈다는 말에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금껏 시댁 식구로 생각하고 있던
서방님에 대한 이미지가 깨지는 것도 싫고
인간의 밑바닥이 드러날 것 같아서 싫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재산에 대한 얘기를 깨달음이 서방님과
잠깐씩 했던 건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깨달음은 장남인 자신보다 동생이
부모님을 더 보살폈기 때문에 부모님 재산은
동생에게 주겠다는 말을 했었다.
자기는 대학 때부터 계속 도쿄에서 지내왔고
동생은 교토에 살았지만 시댁과 거리상으로
가까워 무슨 일이 생기면 늘 동생이 찾아가
시부모님의 애로상항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나도 재산에 대해 그러려니 생각했는데
2020년 초, 갑자기 시부모님 요양원비가
부족하다며 우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전재산을 서방님이 갖고 있었고
요양원비는 두 분의 연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돈이 부족할 일이 전혀 없는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고 싶어
그때 처음으로 깨달음이 통장과
입출금 내력을 보내달라고 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통장의 첫 장은 없고
끝페이지만 복사를 해서 보내왔었다.
그날부터 난 서방님의 민낯이 드러나는 게
보고 싶지 않아 깨달음에게
두 형제가 알아서 하라고 선을 그었다.
그래서 오늘 깨달음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번만큼은 도대체 부모님 재산이 얼마였는지
알아낼 거라며 격양된 목소리로
통장을 펼쳐 보여줘도 난 모른 채 했다.
돈의 행방이 왜 이렇게 됐는지 따지고,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이미 두 분은
돌아가셨고 깨달음은 동생에게
모질게 추궁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부모님이 남기신 유산이 얼마든
처음 마음 먹었던 것처럼 동생에게
모든 재산을 줄 것이다.
난 두 분이 유언장을 남기지 않으셔서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데 돈 앞에 서면
형제, 자매의 피를 혼탁하게 만드는 것 같다.
혹 깨달음이 동생의 실체를 알게 되더라도
실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돈이라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만들어주지 않는 게 맞는 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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