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한차례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넘어가는 걸 보면
집에 안 계시는 게 분명했다.
엄마와 통화가 된 건 오후가 되어서였다.
엄마는 카톡 메시지를 음성으로 보낸다고 한다.
되도록이면 사투리를 안 쓰고
서울말로 음성을 남긴다고하는데 항상
엄마의 메시지에서는 사투리가 묻어난다.
[ 엄마, 신발 마음에 들어? ]
[ 뭔 신발을 두컬레나 보냈냐. 아이고
미안하게..근디 털이 있어서 폭신하니
따뜻하것드라 ]
[ 사이즈는 맞아? ]
[ 응, 사이즈는 딱 맞아, 어떻게 알고
잘 샀네. 요놈 부츠 말고 납짝한 놈은
오늘 저녁 교회갈 때 신고 가볼란다 ]
[ 한국 엄청 춥다고 하던데 발을 따뜻하게
다니셔야 덜 추우니까 꼭 신고 다니셔 ]
[ 응, 알았다..고맙다 ]
[ 엄마,그리고 기운 차리셔, 너무 상심마시고]
남식이 엄마 돌아가셨다며,,]
[ 오메. 니가 어떻게 아냐? ]
[ 다 알지...]
엄마가 남식이 엄마 병문안을 갔던 걸
난 동생을 통해 알고 있었고
그분의 부고 소식도 들었다.
엄마 쪽 먼 친척에 속하는 남식이 엄마는
엄마에게 친구 같은 분이면서
비싼 금리로 딸라돈을 빌려주셨던
고리대금업자? 같은 분이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남식 엄마는 고등학교 때
등장하는데 우리 집이 아빠의 사업실패로
학교에 납부금을 못 낼 정도로
가난 속에 허우적거릴 때 급한 불을
꺼 주셨던 것도 남식 엄마였던 걸로 기억한다.
목청이 너무 커서 남식 엄마가 오는 날이면
나는 얼른 방에 들어가 라디오 볼륨을 크게
높였지만 왜 갚기로 한 돈을 안 주자며
고래고래 악 쓰는 소리는 그대로 들렸다.
그렇게 딱히 좋을 것도 없는 기억들이
조각조각 남아있고 내가 대학원을 다닐 때
집에서 잠깐 뵙는데
나를 향해 여자가 대학원을 다닌다면서
[ 저 가시네가 크게 될 년이네, 야물게
생겨서 공부를 잘하것구만 ]이라고
하셨던 게 그 분을 본 마지막이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오고 깨달음과 결혼을
하고 난 후, 엄마 집에 우리가 보내드린 소포나
선물들을 보고 시집 못 간 당신 딸도 일본으로
시집 보내게 일본인 한 명 소개해 달라고 엄마에게
졸랐다는 얘길 나중에서야 들었다.
엄마가 병문안을 다녀오고
3일 후에 돌아가셨다는 남식 엄마.
[ 다 소용없시야,, 그렇게 쩡쩡하니 성질이
불같고 대장부였는디 다 소용없어, 치매로
내가 아무리 불러도 누군지도 모르고
눈만 멀뚱 멍뚱 뜨고 있더라 ]
엄마는 훌쩍거리면서 또 말을 이었다.
[ 돈 안 갚은다고 나한테 죽이네 살리네
징하게 악을 쓰고 난리였는디..
그 많은 재산도 다 필요없고,,갈 때는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가불어,,인자,
내 주변에는 다 죽어불고 나만 남았다.
나도 언제 죽을랑가 모르것다..]
엄마가 장례식장을 다녀오신 후
많이 의기소침해 계신다는 얘길
동생에게 들었는데 아직까지는
슬픔이 남아 있는 듯
계속 눈물을 흘리셨다.
[ 엄마, 그래도 기운 내시고, 요즘은
100살이 기본이래. 아직 12년 남았으니까
여행도 더 가시고 그래야지.
그만 서운해 하시고 힘을 내셔야지 ]
[ 그래야지..근디..나도 언제 갈지 몰라..]
[ 그건 그렇고 엄마, 그 신발 깨서방이
고른거야 ]
[ 그래? ]
지난달, 엄마가 조카 결혼식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오셨을 때 언니가 화장실에
계시는 엄마 사진을 보냈었다.
깨달음이랑 사진을 보다가 서울이 너무 추워서
장갑도 끼고 따뜻하게 입으셨다라는 얘길
하다가 문득 신발이 운동화여서 춥지 않겠냐는
말이 나왔고 당장 사드리자고 해서
바로 그날 신발매장에 가서
발목까지 올라오는 반부츠랑 모카신을
사서 보내드린 거였다.
[ 오메.그랬구나, 그렇지 않다도 겨울용
구두 하나 샀다. 이렇게 털은 안 달렸어도,
근디 이 털신이 신어본께 징하게
따숩다야, 깨서방한테 고맙다고
꼭 전해 주라잉 ]
엄마는 푸념하듯이 같은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 인생,,짧아야, 긍께 그냥 다 내려놓고
재밌게 살아라, 그것이 최고여,
다 필요없다..건강해라잉 ]
엄마 말씀처럼 사는 게 뭐 별 게 있나
싶어지는 요즘이었다.
나이를 들어감에서 오는 무상함도 있겠지만
자꾸만 지금 바둥거리며 하는 일들이
부질없다는 생각들이 계속됐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사람이라는 생활을 해보며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체험하다가 떠나간다.
삶과 죽음이 그렇듯, 우리의 삶이
긴 것 같지만 잠시 왔다가
사라져 가는 게 아닌가 싶다.
짧지만 길고,,쓰지만 달기도 하는 것,,
엄마 말씀처럼 다 내려놓고 삶을 즐기는 게
최고인데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것
또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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