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는 오후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집까지 온다길래 그냥 밖에서 보자고 달랬다.
실은 지난주말부터 날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오늘에서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토요일, 오전에 내게 전화를 했을 때에 비하면
모든 게 차분해진 그녀는 레스토랑에
앉자마자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했다.
[ 마루야마 상, 경찰서는 다녀왔어요? ]
[ 응,,,어제 갔다 왔어..]
[ 왜 바로 안 가고 어제 갔어요? ]
[ 솔직히 아직도 긴가민가 해..]
[ 경찰에서는 뭐래요? ]
[ 두명의 형사 앞에서 취조당하듯 경위서를 쓰는데
이런 사기가 자주 일어나는 일이여서인지
날 아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봐서
기분이 좀 나빴어 ]
마루야마 상은 60대 초반으로
나와는 모단체에서 알게 됐는데
한국을 너무 좋아해서 자신에게 분명
한국인 피가 흐를거라고 시골에 갈 때마다
할머니에게 과거를 깨묻곤 했다.
그렇게 집요하게 핏줄찾기를 한 덕분에
친척 중에 한 명이 조심스레 증조할머니가
한국인였을 거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 마루야마상이 지난주 흔히 말하는
국제 로맨스 사기를 당해
50만엔(한화 약450만원)를
송금한 사건이 있었다.
ATM 기 송금 버튼을 누른가 동시에
뭔가 기분이 이상하면서 아차 싶더란다.
심장이 뛰기 시작하면서 바로 내가 생각나 내게
전화를 해서는 자기가 사기당한 것 같다고
울먹이며 막무가내로 당장 만나자고 했었다.
진정시키고 자초지종을 들어봤더니
누가 들어도 바로 사기인걸 마루야마 상은
귀신에 홀린 듯 송금을 하고 말았단다.
40대 초반에 자칭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그 남자는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할머니와 함께
살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사업가로서 성공을
했고 지금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보석을 판매한단다.
일본에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고 초밥을 좋아하며
올 겨울에 일본에서 작은 보석상을 차리고
싶어 돈을 미리 송금하고 싶다고 했고,,
듣고 있으니... 참 어리숙한 스토리인데
마루야마 상은 진실로 믿었단다.
[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안부인사를 묻고
정말 예의가 있었어, 달콤한 말을 별로
없었지만 그냥 뭐랄까 관심을 가져주는
느낌이 좋았던 거 같아. 또 내가 한국요리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일본에서 만나면 꼭
자기를 가이드시켜달라고 그래서 내가
코리아타운도 알아보고 그랬는데..]
[ 영어밖에 못한다면서 어떻게 대화를
한 거예요? ]
[ 번역기로 돌려서 하니까 어색한 문장들도
많고 그랬는데 오히려 그게 귀엽더라고..]
[ 경찰서에서 모두 다 말했죠? ]
[ 응, 핸드폰에 대화창도 다 사진 찍어 갔어 ]
마루야마 상은 파스타를 먹으면서도
그 남자와 나눈 대화 내용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내게 상세히 설명했다.
[ 나한테 작은 선물을 보냈는데 그게 세관에
걸려서 세금을 물어야 한다고 그러면서
일단 50만 엔을 보내달라고 그랬어..]
[ 거기서부터 이상한 거잖아요.. ]
[ 근데. 그때는 나한테 선물 보내려다가
그런 거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
그래서 50만 엔을 보내고 나니까 더 보내야
한다고 안 그러면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러니까 덜컥 겁이 나더라고 ]
마루야마 상는 얘기를 하는 중간중간 주변을
살피며 불안해했다.
우린 차를 마시러 자리를 옮겼다.
어떤 위로의 말을 해 드려야 할지 몰라
경찰서에도 가고 다 끝났는데
왜 나를 만나고 싶었냐고 물었더니 이유는
모르겠는데 나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만나면 여전히 꿈꾼 것 같은
멍한 상태에서 벗어날 것 같아서라고 했다.
[ 송금한 곳이 일본 계좌니까 잡히겠죠? ]
[ 근데.. 경찰은 가망 없다는 식으로 말했어,
대포통장 같은 거라면서..]
우린 엊그제 아프리카 가나를 거점으로 둔
일본인 로맨스 사기꾼이 잡힌 얘기를 했다.
마루야마 상은 솔직히 한국계라는 말에 호감이
갔던 게 사실이라며 한국인 남성들이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했다.
그날 이후부터 로맨스 사기에 관한 검색을
밤이 새도록 해봤더니 자신이 당한 수법과
거의 똑같더라며 잘 생긴 한국인 남성들 사진을
보면 연예인 같더란다.
[ 근데 그런 잘 생긴 남자들 사진을
몰래 다 퍼 와서 일본인이 한국인 행세를
하며 사기를 쳤던 거겠지,,
케이 짱,, 정말,, 나 바보 같지? ]
몇 천씩 뜯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50만 엔으로
끝나서 어찌 보면 다행이지 않냐고
위로 같지 않은 말을 했더니 송금하고 바로
나와 통화를 안 했으면 아마 더 보냈을지도
모른다며 내가 바로 사기라고 절대로
더 이상 보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말이
자신을 살렸다고 고맙다며 비싼 수업료 내고
인생 공부했다고 생각하겠단다.
하지만, 내가 오늘 만난 마루야마 상은 여전히
몽롱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자기에게
사기 친 그 한국인 남성이 가상이 아닌 진짜
존재하는 인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참 따뜻한 남자였단다.
그런 인물은 예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매뉴얼처럼 여자에게 환심을 사게 하는
멘트들이 있는 거라고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정신 차리라고 다그쳤더니
알았다고 한국인 행세를 한 사기꾼으로
생각하겠단다.
50만 엔이라는 금전적인 피해를 본 것보다
마음의 상처를 더 크게 입은 것 같았다.
왜 하필 한국인으로 사칭을 했을까..
아님, 정말 한국인이었을까..
설레고 두근거리는 이성의 마음을 이용한
사기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지인이 당할 줄은,,
그리고 그 후유증이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심히 걱정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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