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역으로 갔다.
이 자식은 늘 이렇게 날 부른다.
적어도 2주 전에는 미리 말을 해야 만날 수
있다고 아무리 얘길해도 이렇게
느닷없이 불러도 내가 나와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얌체같은 놈이다.
[ 너 정말 죽을래? ]
[ 누나나앙,,,,,,,]
[ 콧소리 하고 난리야,, 징그럽게..]
[ 이번에는 정말 출장이야,, 그래서
연락 미리 못했어.. 갑자기 나도
오게 된 거거든...]
[ 이걸 그냥 !!!]
[ 어우, 무서워랑,,,,,]
정말 뒤통수를 한 대 갈리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몸을 비비 꼬길래 그냥 봐줬다.
술잔에 얼른 술을 따라주는 후배 재준이.
[ 재준이 (가명) 너 얼굴 찍어서 블로그에
올린다, 뻔뻔한 놈이라고,, 그리고 왜
이렇게 자주 오냐? 일본에 ]
[ 그럼,, 내가 소송할 거야,,
초상권 침해받았다고,, 헤헤
그리고 나,, 작년 9월에 오고 지금
1년 만에 온 거야,, 자주 온 거 아니야 ]
히죽히죽 웃으며 이것저것 주문을 하는
재준이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조금 겁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재준이 얼굴 본 지
서너 개월 정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1년 전이라고 하니 무슨 놈의 시간이
이리도 빨리 가는 건지, 나만 하루가
12시간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현실감이 떨어졌다.
재준이는 내가 좋아하는 초밥을 알아서
주문하기도 하며 뜨문뜨문 무슨 일로
왔는지, 또 자기 회사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섞어가며 얘길 했다.
[ 이제 일본 와도 나한테 연락하지 마라,
진심이다, 귀찮아,, ]
[ 알았어. 진짜 안 할게, 근데 여자 친구랑
와서 연락하는 건 괜찮지? ]
[ 여친 생겼냐? ]
[ 응,, 아직 두 달 밖에 안 됐어..]
독신으로 산다고 미혼주의 선언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친이 생겼단다.
[ 그래, 잘했다. 얼른 결혼해라 ]
[ 결혼은 안 할 거야,, 그냥 즐기지..]
[ 니 여친 전번 줘 봐, 니가 말한 것
그대로 녹음해서 알려주게 ]
[ 이 나이에 무슨 결혼이야,
사십 대 후반인데,, ]
다시 회사 얘기로 화제를 바꾼 재준이가
일머리 없는 상사 때문에 죽을 맛인데
때려치우고 싶지만 그래도
월급쟁이가 최고로 편한 직업이라는
생각에 그만 두지 못한다고 했다.
큰 누나는 카페를 하고 작은 누나는
편의점을 하는데 자영업자들을 가까이
두고 봐서인지 더 회사를
그만둘 수 없더란다.
이민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장남이고 오직 자기만 바라보고 사는 엄마
때문에도 한국을 못 떠난다는 재준이.
[ 착하네.. 우리 재준이...]
[ 거 봐,, 착하지? 그니까 다음에 와도
만나줘, 누나가 내 마음을 잘 알잖아 ]
[ 나 사는 것도 힘들어, 그니까 신경 쓰이게
너까지 나한테 붙지 말아 줬으면 해.
그리고 다시 말해두는데 미리 연락
안 하면 정말 너 두 번 다시 안 볼 거야 ]
[ 알았어.,.. 누나,,,]
재준이를 보면 나를 보는 것 같아
항상 마음이 쓰였다.
대학원 때도 상당히 재능이 좋고 실력도
괜찮았는데 학업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직장에 들어가야 했다.
어릴 적에 아빠와의 관계에서 생긴
트라우마로 성인이 되어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아픈 30대를 보냈다.
위태로울 때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죽을 이유는 앞으로도 많으니까
지금은 살아라고 당부하고 위로하고
호통치기를 반복했었다.
어느날 전화기를 붙들고 짐승처럼
포효하며 괴로움을 토해내다가
살아야 할 이유를 알려달라고 했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죽어도 안 늦는다고
남들 하는 거 한 번씩은 다 해보고 죽어야
억울하지 않겠냐고 그리고
나도 살아있으니 너도 살아라고
했던 말도 기억난다.
[ 재준아,, 그냥 결혼해..]
[ 웬일이야? 누나가 결혼을 권하네,누나가
결혼 같은 건 절대로 하는 게 아니라며,
결혼하면 빼도 박도 못한다고 했던 건
누나야,, 나 그 말이 무서워서
지금껏 결혼 못했는데 ]
[ 그때와 지금도 결혼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함없는데.. 결혼이라는 제도가 체질에
맞는 사람이 있더라고, 널 보고 있으면
누군가 곁에 있는 게 더 삶이 더 윤택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막상 결혼해 보면
엄청 행복할 수도 있잖아 ]
[ 행복 안 하면? ]
[ 그럼 이혼하면 되지 ]
[ 뭐라는 거야? 그리고 윤택하려면
돈 많은 누나 좀 소개해줘 ]
[ 이걸 팍 씨!!! ]
재준이를 볼 때마다 언뜻언뜻
방황하던 내 젊은 날이 스칠 때가 있다.
지금도 전화기에 재준이 이름이 뜨면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인지
연락 없이 찾아오는 이 녀석을
모른채 하지 못한다.
같은 상처를 안고 사는 인간들이 서로를
알아보듯이 나를 닮은 사람을
외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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