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치매 진단을 받은 건 16년전이었다.
내가 일본 유학을 오기 전 마지막으로
모시고 갔던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았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해마다 한 번씩은
한국에 가려고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아빠가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건
진단을 받고 8년 후였다.
한국에 갈 때마다 병실에 누워 계시는
아빠 얼굴에 내 얼굴을 갖다 댔는데
어느 날 부터인가 아빠가 싫어하셨다.
그래도 난 사랑에 굶주린 아이처럼 아빠의 볼을
만지고 아빠의 이마와 귓가에 뽀뽀를 해드렸다.
“엄마, 아빠 냄새 그대로다.”
“그대로냐? 오늘 샤워도 안 시켰는디
냄새 안 나냐?”
“응, 지금 아빠 냄새가 너무 좋아.”
어릴 적에 맡았던 아빠 냄새가 병상에
계셔도 그대로인 게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 아빤 술, 담배도 못하셔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그러시질 않았다.
오직 마누라와 자식밖에 몰랐던 분이셨다.
병원에서도 아버지가 너무 착실하게
살아서 치매도 진행이 빨라진 것 같다고 했었다.
(깨달음이 찍은 시아버지)
일본으로 유학 가는 딸에게
잘 다녀오라는 말 대신 조용히
눈물을 훔치시던 아빠,
유학생활 삼 년째 되던 해 일본 공항에서
날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내던 아빠,
논문 쓴답시고 사 년 이상 한국에
못 갔더니 날 알아보지 못했던 아빠,,,
일본어가 능통했던 아빠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좋아하셨다.
하지만 깨달음과 함께 병실을 찾았을 때는
당신이 일본인 사위를 본 것도 몰랐고,
깨달음이 일본어로 말을 걸면 눈을 깜빡이며
뚫어지게 쳐다보시곤 했다.
아빠를 볼 때마다 죄송하고 미안했다.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아빠를 힘들게 해서,
능력이 없다고 아빠를 미워해서,
아빠한테 사과할 게 너무나 많은데
아빠는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이제 조금은 사람 노릇, 자식 노릇 해보려고 하는데
아빤 날 기억하지 못했다.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진짜 사랑한다고,
아빠 딸이어서 난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아빠는 아무것도 몰랐다.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고, 통곡을 해서
되돌리 수 있다면 한 번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아빠한테 용서받고 싶은데 아빠에게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내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고 아빠는 떠나셨다.
깨달음이 출장을 갔다오는 길에 시댁에 잠시 들러
시부모님 사진을 찍어 왔다. 건강하시다며..
이 날 밤, 잠에서 깨어 한참을 울었다.
돌아가신 아빠를 꿈에서 봤다.
치매가 걸리기 전의 건강한 모습이었고,
지금의 아파트가 아닌 양옥집에 살 때
모습 그대로였다.
깨달음이 말을 잇지 못하는 내 등을 조용히
쓰다듬어주면서 시아버지 얘길해서 친정아버지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라며,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라고 했다.
밖에서 신나게 뛰어놀다 집으로 들어가면
꽁꽁 언 내 손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
따뜻한 입김을 불어주시던 아빠,
추운 겨울날 등교하는 자식들을 위해
연탄불 부뚜막에 다섯 명의 신발을 가지런히 올려
따끈하게 데워주셨던 아빠,
모처럼 끓인 동탯국을 먹을 때도
몸통은 자식들 그릇에 모두 덜어주시고
당신은 대가리만 빨아 드시던 아빠,
지각하던 날은 자전거로 학교까지 바래다주시고
내가 교실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지켜보시던 아빠,
소풍 가는 날이면 집 근처 구멍가게에서
과자며 알사탕, 사이다를 한가득 사와서 엄마에게
욕을 한 바가지 얻어 들으면서도
방긋 웃어주셨던 아빠, 우리 아빠…….
중, 고등학교 때 납부금을 못내 칠판에
내 이름이 적힐 때마다 능력 없는
부모를 만나 이런 창피를 당한다고
아빠를 얼마나 원망했었는지....
고 최진실 씨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수제비를 많이 먹고 자랐다는 얘기를 할 때마다
우리 가족들도 지긋지긋하게
수제비를 먹었던 걸 회상했고,
그렇게 수제비만 먹은 것도
무능한 아빠 탓이라고 불평했었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만큼은 차고 넘쳤었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애지중지했던
자식들은 모두 아무 탈 없이 장성했고,
빚도 어느샌가 다 청산하고,
이제는 자식들에게 효도 받고, 노후 인생을
즐길 일만 남았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치매가 왔고 진행속도도
빨라서 진단을 받고 4 년이 지나면서
자식들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바나나를 무척 좋아하셨는데 좀 사드릴 걸,,,
자장면도 좋아하셨는데 곱빼기로 사드릴 걸,,,
단팥빵과 쿨피스도 좋아하셨는데,
이렇게도 한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우리 시부모님,
그리고 혼자 계신 우리 엄마에게도 있을 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있을 때 잘할 것인데 있을 때 잘했어야 했는데,
못난 딸은 오늘도 미치게 그리운 아빠를
목이 메이게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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