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쿠에 볼 일이 있어 나갔는데 깨달음이
자기도 오겠다고 해서 기다렸다가
이세탄 백화점 지하로 내려갔다.
마른 생선을 좀 살 요량이었는데
입구에서부터 웬 사람들이 가득하던지
뭔 일인가 했는데 화이트데이였다.
10대부터 70대까지 남자분들이 초콜릿을
사기 위해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매장에
다들 줄을 서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깨달음도 화이트데이인걸
이제야 알았다며 기웃거리더니 내가
좋아하는 화이트초코가 있는지 찾아보란다.
[ 깨달음, 나 괜찮아, 우리 원래 잘 안 챙겼잖아]
[ 그래도 왔으니까 하나 골라 ]
맛있게 생긴 걸로 하나 사자는 말에 뭐가
있는지 보려는데 사람들이 유리 진열장에
줄을 서서 기다리느라 뭘 파는지 제대로
보기도 힘들어 그냥 괜찮다고
생선코너 쪽으로 이동했다.
원래부터 발렌타인이나 화이트데이를
잘 챙기지 않아서인지 별 느낌이 없었다.
점점 밀려드는 남자들 사이를 빠져나와
우린 저녁을 먹으러 차이나레스토랑으로 갔다.
[ 온 김에 당신 좋아하는 화이트초코를
사주고 싶었는데..]
[ 아니야, 마음만으로 충분해, 고마워 ]
쇼코슈(紹興酒)를 따르는 깨달음 표정에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였다.
[ 당신 3월 25일이 무슨 날인지 알지? ]
날 지긋이 쳐다보며 깨달음이 입을 열었다.
[ 알지, 우리가 부부가 된 날, 서류상으로 ]
[ 맞아, 혼인신고 한 날 ]
[ 왜? ]
[ 아니. 그냥,, 벌써 12년이 되는구나 싶어서]
[ 그러네... 세월 빠르네..]
어제 회사로 동생에게서 우편물이 도착했는데
시어머니가 깨달음 이름으로 들어놓은
보험증서였다고 한다.
[ 태어났을 때부터 들어 놓은 보험이야? ]
[ 아니, 내가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18살 때 넣어둔 거더라고 ]
의료비 해택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종합보험 같은 것인데 부모랑 떨어져
혼자 생활하는 아들이 행여나 아파 병원신세를
지는 게 걱정돼서 의료해택이 많은 거였더란다.
[ 보험 증서 받고 기분이 이상했어? ]
[ 응,,]
작년 4월, 그리고 8월에 시어머니, 시아버지
두 분을 모두 떠나보냈다.
연로하신 것도 있었지만 두 분이 한 해에 같이
가셔서 참담한 기분도 두 배였었다.
다음 달이면 어머님 1 주기가 되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어머니 흔적을 받아보고 나니 오만가지
생각 속에 빠져들었단다.
깨달음은 대학생활을 자취가 아닌 하숙을 했었다.
아버님은 1년에 두 번씩 도쿄에 올라와
깨달음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사주시고는
바로 시골로 내려가셨단다.
어머님은 한 번도 도쿄에 올라오신 적이
없었지만 하숙집에 옷이나 속옷들을
소포로 보내셨단다.
[ 우리 엄마가 표현이 서투셨던 분이었어,
아버지는 정도 많고 감정이 풍부하셨는데
엄마는 항상 참고 인내하는 스타일이었지,
근데 보험증서를 받아보니까 그동안 내가
깨닫지 못했던 엄마의 사랑 같은 게
많이 느껴지더라고 ]
나는 그냥 깨달음이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할 수 있게 고개만 끄덕이며
아무 말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 내가 잊고 있는 거 같아서 깨우쳐 주려고
보내셨나 봐, 보험증서..
지금 생각해 보면 자라오면서 특별히
말썽 부린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효도다운 효도를 한 게 없어서
죄송한 생각이 들었어 ,,, 그래도 당신이랑
결혼하고 매년 두 세번씩 항상 같이 시골 내려가서
말동무도 해주고 같이 목욕도 가고 그래서
참 좋아하셨는데...
딸이 없어서 항상 혼자 가신 목욕탕을
며느리랑 갈 거라고는 생각을 못해 봤다며
갔다 와서 나한테 얼마나 자랑했는데..
결혼하고 3년째 쯤인가, 당신이 티브이 보면서
한국 아이돌 얘기하다가 춤췄잖아, 그 때
엄마가 진짜 재밌다며 소리 내서 웃으셨는데..
그 표정이 지금도 생각나,,
정말 행복해 보였거든... 그때,, 내가 아,,
이게 효도구라라는 생각을 했었어...]
부모님이 떠나고 나서야 효도가 뭔지
조금은 알 게 된 것 같다는 깨달음.
눈가가 촉촉해진 깨달음이 분위기를 바꿨다.
[ 3월 25일 우리 결혼기념일에 뭐 할까? ]
[ 특별히 없어..]
[ 또 온천 갈까? ]
[ 아니.. 이번 4월, 어머니 기일에는
내가 일본에 없으니까 5월달에 시골에 함께
내려가서 어머님이랑 아버님 보고 옵시다 ]
[ 그래..]
어머님과 어버님, 두 분을 모신 절에 예약을
넣어두겠다는 깨달음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어머님이 남기신 보험증서에 깨달음은
다시 한번 부모님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셨는지 뒤늦게 감사하게 됐다고 한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부모님의 사랑은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돌아가시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자식들,,
살아 계실 때는 왜 모르고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걸까..
'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행기 이륙 전, 남편이 급하게 보낸 카톡 (0) | 2023.04.19 |
---|---|
결혼 10년이 넘으면 이렇게 변한다 (0) | 2023.03.26 |
조금만 더 무뎌지자, 그래야 산다 (0) | 2023.02.27 |
블로그, 그리고 유튜브, 인스타그램,, (0) | 2023.01.27 |
가난은 솔직히 많이 불편하다 (0) | 2023.01.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