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준비를 마친 깨달음이 안되겠는지
냉장고를 혼자서 끌어낸다.
10년가까이 써왔던 냉장고가 요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새 냉장고를 구입했고
아침에 기사분이 오기로 했는데
작업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 미리 자리를 마련해
비워두는 것도 있고
미팅 시간이 가까워져서 서둘러야 하는 것과
무엇보다 내게 미안해서 뭔가를
하려는 눈치였다.
[ 깨달음, 힘들어,,그냥 둬,,]
[ 아니,,이렇게 해두면 빨리 끝나잖아 ]
드디어 기사분에게서 전화가 오고 10분쯤 지나
두 분이서 새 냉장고를 가져오셨다.
우리가 사려고 했던 모델, 아니 내가 갖고 싶었던
모델은 우리집에 들어올 수 없는 사이즈여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를 해야했고 거실문을
통과 할 수 있는 사이즈로 골랐다.
꽤나 망설였다. 김치 냉장고를 없애고
그냥 마음에 든 사이즈를 구입할 건지
고민을 하다가 김치 냉장고는 그대로
둬야한다는 결론을 낸 선택이였다.
기사분들이 설치를 하고 있는 중에 깨달음은
조용히 현관을 빠져 나갔다.
김치 냉장고와의 간격이 좁아서 위치변경을
해야될 것 같지만 일단 원위치에 놓아주셨다.
기사님들이 나가고서 깨달음에게서 바로
냉장고 설치는 무사히 끝났는지 마음에 드는지
궁금해 카톡을 보내왔고 난 간단히 답장을
보내고 바로 앞치마를 둘렀다.
연말이여서 인사하고, 인사받을 곳이
많은 깨달음은 11월말부터 주말에도
출근을 했고, 날마다 취해서 늦은 귀가를 했다.
이맘때면 매년 같은 패턴이기에 적당히 마시라는 말만
했었는데 날이 갈수록 12시가 다 되어서
귀가하는 횟수가 늘었고, 휘청휘청
흐트러진 상태로 술을 감당하지 못했다.
본래, 긴 말을 하지 않는 내가 더 말수를
줄였을 때는 화가 나 있다는 거라 눈치를 챈
깨달음은 오늘도 나혼자서 해야할 일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먼저 미안해 했다.
김치 냉장고를 열어보니 양쪽 모두
서리가 단단히 끼여있다. 그것들을
제거하고 엄마가 주신 묵은김치, 김,
젓갈,고춧가루를 새 용기에 옮겨 담고,
먹지 않고 두었던 마른나물들,,,
그리고 한방재료들은 그냥 모두 버렸다.
놔두어도 해 먹지 않을 게 분명해서였다.
그릇들을 닦고 새 냉장고에 넣다가
오후 약속이 있어 그대로 두고 집을 나섰다.
일을 보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혼자 간단히
먹고 정리를 다시 하다가 하는김에
주방 환풍기까지 뜯어서 모두 씻고 닦았다.
어차피 새해를 맞이하려면 연말 대청소를
해야하기에 미리하는 거라 생각코
깔끔히 청소를 끝냈다.
10시 5분전,카톡이 떴다.
오늘은 동창들 송년회니까 저녁만 간단히
먹고 오겠다더니 재즈바까지 들렸다 오느라
늦였다며 미안하다고 하길래 11시 넘으면
벌금이라고 했자 11시전까지 집에 간다면서
NO라는 절규 아이콘을 보내왔다.
정확히 10시 50분, 집에 도착한 깨달음은
얼른 자기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사왔다며 내밀었다.
[ 밥만 먹고 온다며 왠 재즈바까지 간거야? ]
[ 항상 10명이 모였는데 오늘은 7명이였어,
두명은 하늘나라 가고, 한명은 바빠서 못왔어.
그 친구들을 회상하다가 대학시절에 다녔던
재즈바 얘기가 나와고, 오랜만에 가보자고
의기투합해서 기억을 더듬어 가봤는데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더라고..]
[ 하늘로 간 친구들 생각해서 술을 줄인다고
하지 않았어? ]
[ 그랬는데..오늘은 그냥 마셨어..]
[ 그래도,,적당히 마시고 다녀 ]
[ 그리고 친구들이 우리 부부가 부럽대 ]
[ 뭐가 부러워? ]
[ 언제 오는지 걱정해주는 와이프는
당신밖에 없잖아, 역시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라서 좋겠다고 그랬어.
우리 친구들은 진작부터 남남처럼
지낸다는데 우리는 안 그러잖아,
그래서 내가 카톡 보여주면서 자랑했어 ]
깨달음은 작년에 세상을 떠난 친구와
있었던 대학시절 얘기를 다시 꺼냈고 사는 게
허무하다며 친구들이 퇴직하고 집에서 뭘하며
지내는지 아주 현실적인 얘길 내게 했다.
[ 그래서 뭘 느꼈어? ]
[ 응,,살아있을 때, 즐겁게 살고,,
사랑도 듬뿍하며 살자고 했어..퇴직한
남편들은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안쓰러웠어 ]
죽은 친구를 생각해도 짠하고, 집에서
남편 대우 제대로 못받는 친구들을 봐도 짠하고
이래저래 서글픈 인생인 것 같다며
사는 게 별 게 아닌데 아둥바둥 거리고
살아가는 것 같다면서 갑자기 서럽단다.
술도 취해 감성에 젖은 것 같아서 얼른 들어가
자라고 했더니 내일도 접대약속이 있어
늦을 것 같은데 자길 용서해 달라면서 애교를 떤다.
결혼하고 연말이면 같은 모습을 보이는 깨달음.
한국은 송년회가 많이 없어졌다고들 하는데
여기 일본은 송년회, 신년회 행사가
전혀 변함없이 행해지고 있다.
몸 상할까봐 늘 걱정이지만
그래도 넉넉한 마음으로 봐줘야 되겠지..
내일 아침도 북어국을 준비해야 될 것 같다.
'한일커플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부부는 이렇게 먹고 산다 (3) | 2020.01.29 |
---|---|
새해를 또 일본에서 맞이했다 (10) | 2020.01.03 |
시부모님, 그리고 난 역시 며느리 (5) | 2019.11.18 |
올해도 이렇게 감사를 표합니다 (98) | 2019.11.13 |
조용히 남편을 응원한다 (3) | 2019.11.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