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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

일본에서 20년을 살아보니

by 일본의 케이 2020.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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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야, 괜찮아? 일본 또 심각해 지더라..

어쩌냐?]

[ 그냥 조심하고 있어 ]

[ 한국에 나올 수도 없고,,정말 답답하겠다 ]

[ 응, 이젠 그냥 포기했어..한국에는 언제갈지

기약을 못할 것 같애 ]

[ 그니까..우리 만나서 여행가기로 했는데 ]

[ 모처럼 너랑 긴 시간 가지려고 했는데

이렇게 하늘길이 막혔다...]

[ 정말,, 코로나,,어떡해,, 깨서방도 잘 있지? ]

[ 응,,잘 있어. 아 00은 언제 아이 낳아?

 아들이야, 딸이야? ]

[  다음주가 예정일이야, 딸이래 ]

[ 00닮으면 예쁘겠다. 미리 축하한다고 전해줘.

 직접 가서 축하해줄 참이였는데...그리고

내가 직접 주려고 샀던 선물 그냥 보낼게 ]

[ 맨날 보내기만 하냐,,안 보내도 되는데..

보내지 말고 그냥 니가 가지고 오면 좋은데,

오랜만에 얼굴보고 그러고 싶었는데..]

[ 나도 그러고 싶다...]

우린 그냥 허탈하게 웃었다.

 

 

7월이면 할머니가 된다며 내게 투정을 부리던

친구와 통화가 끝나자 이번에는 후배에게서

카톡이 온다.

일본에 코로나 감염자가 늘어날 때마다 가족을 포함

친구, 후배들이 걱정된 마음에 안부를 확인한다.

오늘 도쿄의 감염자수는 238명,

전국적으로는 724명이였다.

여전히 반 이상은 감염경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경로를 물어도 묵묵부담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여서 추적할 길이 없다.

긴급사태를 재실시해야한다는 여론들이

분분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워서

죽어가는 경제를 살리는데 무게를 두기로

 일본 정부는 택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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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6일은 20년전, 내가 일본유학을 위해 

큰 가방을 끄집고 나리타공항에 내렸던 날이다.

픽업을 온 어학원 관계자를 만났던 신주쿠역은

형형색색의 간판과 큰 빌딩들로 가득했다.

촌년처럼 두리번 거렸더니 그 남자분이 신주쿠엔 

사람이 많아서 길을 잃을 수 있으니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말라고 했던 것도

기억한다.처음엔 어학연수만 3개월 할요량이였는데

 하다보니 조금씩 욕심이 생겨 다시 3개월을 

연장,,그러다 2년, 또 다시 2년을 늘려가고,,

그렇게 공부에 전념하다보니

훅하고 10 년이 흘러갔다.

결혼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외국인, 그것도

일본인과 결혼까지 하였고

이젠 결혼생활도 10년을 향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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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라를 떠나 산다는 게 적당한 자극도 있고

 

생소함에서 오는 설레임, 그리고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게 

특별한 느낌이였다.

그래서 행여나 불이익이라 생각되는 일들이

내게 닥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했었고

외국인이라는 편견이나 고정관점의 틀에

짜맞춰지는 게 싫어 누구보다

더 충실한 시간들을 보냈다.

학생신분일 때도 이젠 사회인의 일원으로서도

내 스스로의 가치와 존재감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외국인이라는, 또한 한국인이여서라는

차별을 받지 않기위해 행여 그런 분위기가

느껴질 때면 그 상황을 납득할 수 있도록

상대에게 설명해주길 원했고

 내게 문제점이 있었는지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며 대처를 해왔었다.

원래 성격상 두리뭉실 넘어가려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아서도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 못본척 하지 못했다. 

일본생활 3년째 되던 어느날, 대학원 

동기였던 일본인이 내게 말을

 함부로  못하겠다고 했다.

일본어의 미묘한 뉘양스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금방 알아차린다고,,,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언어습득이 

가장 큰 무기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기에

 지금도 난 모르는 단어를 찾기위해 

책을 펴칠 때가 종종있다

 

20년을 살며 느낀 일본, 그리고 일본 사회..

한국인에게도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기질이 있듯이 이곳 역시도 일본인다운, 

일본스러운 기질은 분명 존재한다. 

흔히들 일본인은 겉다르고 속다른 사람들이라

말하는데 그건 틀린 말은 아니다.

요즘은 한국인도 속내를 거의 보이지 않아서 

일본인화?되어간다고들 친구들은 말하지만

그것과 조금 다른 전형적인 일본인의 

특징은 거짓웃음을 잘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싫으면 싫은 내색이 바로

 얼굴에 나타나지만 일본인들은 그

런 감정을 아주 잘 감춘다.

그래서 웃으면서 상대의 뒤통수를

가차없이 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구조 면에서 보면 일본의 조직사회는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좋게 표현하자면,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할수 있지만

새로운 방식, 새로운 물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룰을 만들고 익히는 게 많이 서툴다,

그래서인지 새롭게 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선 긋기가 분명하고 섞이고

동화되는 걸 불편해한다.

지금 있는 그대로 순응하며 그냥

지금상태로 살아가길 원한다.

그 덕분에 근면, 성실함이 장점이 되어

100년, 150년이 넘도록 한자리에서

센베이 굽는 일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전통에 적용되었을 땐 큰 힘으로 

작용하지만 21세기와는 동떨어진채로 

멈춰있는 인프라들이 꽤 많아서

정말 선진국인가 의구심이 들때도 많았다.

이들도 자신들의 폐쇄성에 어느정도 인정은 

 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의의를 제시하고

변화를 일으키려 하지 않기에 

열린사회가 아닌 소통부재인

상태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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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20년 도쿄 올림픽 보란티어로 선발되면서

 이런 생각들을 했다. 일본생활 20년을 기념으로

 멋지게 마지막 봉사를 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완전한 귀국은 아닐지라도 귀국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마침, 서울에 사 둔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었고

뭔가 딱딱 들어맞는다 싶었는데 코로나19라는

복병으로 모든 계획들이틀어져 

다시 스케쥴을 짜야했다.

지난 20년간, 일본어 어학원을 시작으로 

이곳에서 배운 게 참 많았다. 

여러모로 배울 게 많은 나라임은 분명하지만

그 반면엔 절대로 배워서는 안되는 것들도

상당히 많은 나라였다.

 이들만의 문화, 이들만의 인간관계, 그것들을

 익혀가며 이들과 함께 살아왔다.

물론 정말 이질적이여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독특한 목욕문화, 성문화들도 있었지만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하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뒤돌아보면 외국인이라는 신분이였기에

 좀 더 바르고, 좀 더 착실히, 좀 더 열심히,

좀 더 성실하자고 다짐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래야만 이곳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늘 마음속에 새겨두었다.

가끔은 일본이 아닌 미국이나 유럽에 유학을

떠났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그곳이 어디든 이렇게 내 나라가 아닌 이방인으로

20년을 일본에서 살아보니 점점 그리워지고

애착이 가는 건 내 나라인 게 분명해졌다.

간혹, 일본에서 살고 싶다며 내게 조언을 

구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분들께

난 이렇게 말한다.

살아보시라고, 이곳에서 살아봐야만이 

내 나라가 꽤 괜찮은 나라였음을 

살면 살수록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라고,,

50대에 접어든 나이탓도 있겠지만 

이젠 가족들과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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