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렌타인 데이가 언제 지나간지 모르게 지나갔다.
매장에 초콜렛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곧 바렌타인이 온다는 생각은 했는데
어느 순간 잊어버렸다.
아침에, 문뜩 생각나서 바렌타인데이
그냥 지나쳐 미안하다고 했더니
은근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
실눈을 뜨고는 왜 잊었냐고 묻는다.
[ 초콜렛 필요 없잖아,,,
그 대신 당신 필요한 거 있음 말해,,사줄게]
[ 진짜 사 줄거지?]
[ 응 ]
그렇게 저녁이 되서 깨달음이 좋아하는
게요리 전문점을 찾았다.
코스요리로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자 서로
아무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코스 요리가 반 정도 나왔을 때쯤 깨달음이 입을 연다
[ 왜 잊었어? ]
[ 그냥, 바쁘다보니까 넘어가 버린거야,
나는 다음주 혼인신고날이 더 뜻깊은 것 같아서
그 때 겸사겸사 할까라는 생각도 있었어..
그래서 그냥 넘어갔어,,실은,,]
[ 당신도 이제 늙었나 보다..]
[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 옛날에는 무슨 날, 꼭 챙기고 챙겨 줬잖아]
[ 응,맞아,늙은 것도 있고 그냥 귀찮아졌어]
[ 갱년기여서 그래 ? ]
[ 음,,꼭 갱년기여서라기보다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
당신은 안 귀찮아? ]
[ 응,,나는 아직까지 그런 생각 안 들어]
[ 당신이 정신적으로 훨씬 나보다
젊고 건강한 것 같애..]
[ 조용히 살고 싶다는 건 무슨 뜻이야?]
[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간다는 게
점점 조심스러워져, 조금 무뎌지고,
조금 너그러워지고 조금 더 기다릴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에
내 말과 행동들이 과연 어떨까 되돌아보는
시간이 늘어가고,,좀 차분해지고 싶어,,]
속이 차여져가는 벼이삭처럼 점점 고개를
수그리며 살아가는 방법도 터득해야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하며, 경험하면서 부족한
나를 채워가는 그런 조용하면서도 안정된
시간들을 만들고 싶어..]
[ 당신 너무 할머니 같은 소리 한다..
지금도 충분히 차분해~~]
[ ........................... ]
[ 아무리 그래도 할머니는 너무 한 거 아니야? ]
[ 미안,,]
또 그렇게 침묵이 흐르다 내가 물었다.
[ 당신은 올 해 자신과 무슨 약속을 했어?]
[ 아무것도 안 했는데? ]
[ 난 당신이 말을 좀 줄였으면 좋겠어]
[ 왜? 아줌마 같아서? ]
[ 아니,,말이 많으면 실수가 잦아져..
특히, 남자는 말을 아껴야 해 ]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깨달음은 물수건으로
자기 입을 막는 시늉을 냈다.
[ 단 하루를 살아도 백년을 산 것처럼 사는 이가
있는 반면 100년을 살았어도 단 하루도 산 것처럼
못 살고 떠난 이가 있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점점
투명해지고, 내 몸과 마음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 것 같아..]
[ 나이 먹는다는 소리 그만해~
난 아직 젊게 살고 싶어..]
듣기 싫었는지 그만하라고 다그쳤다.
마지막 디저트를 먹으며 다시 깨달음이 입을 연다.
[ 나이에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한다고 나도 생각해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
진정한 어른이 되고, 성숙한 노인으로
늙어간다는 게..근데,,나는 어린아이처럼
밝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어.
나이 들어도 귀여운 노인이라고 할까..
속 없는 노인이 아닌 모두와도 잘 어울리며
어디에서나 감초같은 역할을 하는 노인...
그렇게 나이를 먹고 싶어..]
[ 내가 봐도 당신은 분명 60이 되고
70이 되어도 사람들과 잘 어울릴 것 같애 ]
[ 그게 재밌지 않아? ]
[ 맞아,근데 잘못하면 주책없어 보일 수도 있어]
[ 아, 한국에 가서 노후를 보내야하기 때문에
난 아직도 젊게 젋게 살아야 돼!
한국에서 할 일이 많이 남았거든,
한국어 공부해야지,
여행 가야지, 먹거리 투어 해야지,
친구도 사귀어야지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난 아마 늙을 시간이 없을 거야~]
[ ........................ ]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국의 옛 선비들이 지혜로운 삶을 가꾸기 위해
7가지 생활 강령이 있었다고 알려줬다.
하루에 감사하는 말을 세 번 하기.
홧김에 나오는 말을 세 번 참기.
칭찬하는 말을 세 번 하기.
잘못했다는 말을 세 번 하기.
세 번만 꾸짓지 않기.
세 번만 탓하지 않기.
세 번만 헐뜯지 않기라고,,,
듣고 있던 깨달음이 반문한다.
[ 내 생각엔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 잘 자고
또 중요한 것은 웃기면 웃고, 슬프면 울고,,
감정이 흐르는대로 맡기며, 절대로 스트레스를
만들지 말고, 화가 나는 일은 바로 풀 수 있는
마음자세로 사는 게 젊게 늙어가는 거라 생각해.
너무 많이 참고, 무리해서 칭찬하고,
억지로 감사하다고 해서 멋지게 늙은 게 아니야
그냥 단순하게 사는 게 제일 좋은 거야 ,
그리고 난 한국에서 젊은 언니, 오빠들이랑
놀아야하니까 늙으면 안 돼 ]
[ ........................ ]
그래,,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잘 자고,,
그것만큼 중요한 게 어디있겠는가..
특히, 한국에서 제 2의 인생을 펼치려면,,,
깨달음은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좀 더 젊게, 좀 더 즐겁게 살려고 나름의 단순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실은 보기 좋다.
하지만 가끔 너무 철부지 같을 때가 있어 조금
걱정스러울 뿐이다.
전철에서 내려 깨달음이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삐쭉거리며 웃는다.
오늘도 끝까지 까불까불 거리며
젊게 늙어가는 깨달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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