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부터 가스레인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3구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레인지가
접촉불량인지 점화되지 않았다.
기사분 출장료 4천엔과 체크사항을 적어둔
메모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난 일 때문에 나왔고 깨달음에게 맡겼다.
일하고 있는 중에 사진이 몇 장 날아왔다.
기사님이 다 뜯어보고는 고치는 단계를
넘었다고 그냥 교체하라고 했다며 티브이처럼
가스레인지도 수명이 10년인데 우리
가스레인지는 13년 전 모델이라고 했단다.
[ 깨달음, 이번 기회에 IH로 바꾸면 어떨까? ]
[ 깔끔하고 좋긴 한데 지진이 나면 전기가 바로
끊겨서 아무것도 못해. 그니까 가스가 좋아 ]
[ 그래?... 나 IH로 바꾸고 싶었는데..]
[ IH로 바꾼 사람들 휴대용 가스버너를 두대씩
상비해 놓은데.. 지진 대비용으로 ]
난 자꾸만 IH로 눈길이 갔지만 깨달음 말이
맞는 것 같아서 가스레인지를 선택하고
공사날은 서로의 스케줄에 맞췄다.
근처 이탈리안에서 식사를 하며
깨달음이 IH 보다 가스레인지가 가진 장점이
훨씬 많다며 서운해하는 나를 달랬다.
[ 당신,, 곧 생일 다가오는데 갖고 싶은 거 있어? ]
[ 없어..]
[ 그럼,, 크루즈에서 생일파티 할까? ]
[ 그래...]
우린 엄마를 모시고 크루즈를 언제 가는 게
좋을지에 대해 얘길 나눴다.
살아계신 동안에 유럽 쪽으로 한 번
모시고 싶은데 내년 봄이면 자기도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 이번에 크루즈, 당신은 별로 안 가고 싶어
했잖아, 왜 그랬어? ]
[ 그냥,,,]
다음 주에 떠나는 크루즈 여행을 선택한 건
깨달음이었다. 내 생일도 있고 해서
오랜만에 크루즈를 타자는 거였는데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깨달음에게 지난번에 포기한
서울에서 일주일살기를 올 겨울에야말로
꼭 하라고 강력하게 권했지만
깨달음은 싫다고 했다.
일주일 살기는 언제 해도 좋은데 생일은
1년에 한 번이니 내 생일에 초점을
맞추겠다며 크루즈를 예약했다.
크루즈는 아닌 것 같다며 취소를 두 번이나
하고 한국행을 예약했다가
또 취소하기를 반복했었다.
당신이 가라, 아니 당신이 가야 된다,
서로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느라
여행사를 귀찮게 했었다.
여전히 난 망설이고 있다고 하자 내가 또
취소하겠다고 할까 봐 다시
가스레인지 얘기로 돌리며 이번에는 오븐에
쿠키 같은 것도 만들어 보자고 했다.
[ 근데, 깨달음, 10년이라는 시간이.. 참 많은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 같아..]
[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잖아 ]
[ 그래서 우리도 변한 것 같아? ]
[ 변했지.. 이번에도 서로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느라 우리 담당자를
피곤하게 했잖아,,]
[ 그랬네.. 당신 스스로도 변한 것 같아? ]
[ 나는 별로 안 변했는데 내가 봤을 때
당신이 많이 변했지, 그렇지 않아도 엊그제
우리 직원들이 당신 보고 정말 많이
둥글둥글 해졌다고 그랬거든.. ]
내가 그렇게 뾰족하고 불편했다는 건가 싶어
무슨 말들이 오갔냐고 물었더니
내가 일할 때 모습이 상당히 날카롭고
빈틈이 없어 다가가기 힘들었는데
언젠가부터 많이 부드럽고 여유로움이
느꼈다고 했단다.
[ 나도 늙었다는 거겠지.. 우리 집
가전제품처럼..]
[ 인간이든, 물건이든 세월이 가면 늙고
낡고 그러는 거지.. 뭐...]
우린 인간도 10년에 한 번씩
신체의 일부를 하나씩 새것으로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릴 했다.
오후가 돼서 린나이 기사님이 오셨고
옛 가스레인지가 연식이 오래돼서 부식이
심해 뜯어내는데 좀 시간이 걸렸지만
30분 만에 새것으로 교체작업이 끝났다.
기사님이 가시려다가 밑에 달린
오븐상태를 무료로 체크해 주시면서
5년 정도 더 쓸 수 있을 거라 하셨다.
요즘은 많은 기능이 장착되어 있어서 요리하기
편할 거라며 사용법도 간단히 설명해 주셨다.
옆에서 보고 있던 깨달음이 모든 전자제품은
기본적으로 수명이 10년쯤이냐고 물었고
기사님이 고장 없이 10년 썼으면 잘 쓴
편이고 본전 뽑은 거라면서 웃었다.
지난 3월에는 티브이를 다시 바꾸고
이번에는 가스레인지를 바꿨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주변의 것들을 하나씩
새것으로 리셋하는 시간들인가 보다.
우리는 결혼을 하고 13년이 되는데 하나 정도는
리셋 되었을까....내가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제3자들이 평가를 했다니 리셋까진
아니지만 아주 조금은 변한 듯하다.
가전제품처럼 새것으로 교환할 수 없는
인생이니 조금 더 둥글 둥글,
유연하게 살아야 될 것 같다.
주변사람들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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