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동료인 우스이 (臼井)상이
차를 한 잔 하자고 했다.
실은 올 봄부터 꽤나 집요하게 연락이
왔었는데 적당히 핑계를 대며 넘겼는데
오늘은 미팅이 있어 움직이다 보니 우리 집
근처까지 왔다길래 약속을 잡았다.
무엇 때문에 만나자고 하는지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서 지금 만나는 게
맞는지,, 아니면 끝까지 사양하는 게
좋았을지 애매모호한 상태로
커피숍으로 향했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우스이 상이
날이 선선해졌다는 통상적인 인사를
하면서 오늘 아침 자기 남편과
옷차림으로 실랑이를 벌였다는 얘기,
그리고 바로 이어서 자기 아들 얘기,,
또 자기 집 고양이와 옆집 고양이까지.,,
그렇게 계속해서 주변 얘기를 하다가
막간을 이용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 우스이 상, 괜찮아요,,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오신 거 다 알아요, ]
[ 역시,, 정 상은 눈치도 빨라,,, ]
[ 그냥,,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내가 말 문을 열어서인지 그는
머뭇거림 없이 내게 다시 일을
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나에게 다시 복직을 해달라는 말을
누가 할 것인가, 누가 해야만이 가장
효과가 있는지 사무실에서 투표 같은 걸
했는데 자기가 당첨이 돼서 총대를 메고
왔다며 좋은 소식 들고 가야 한단다.
[ 은근 부담 주시네요..]
[ 아닙니다.. 무엇보다 정 상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죠 ]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부터 병행해 왔던 미술 쪽 일인데
지금은 거기에 전념하고 있어서
시간이 안 될 것 같다고 간단명료하게
내 의사를 밝혔다.
[ 일주일에 한 번만 나오셔도 되는데..
아니,, 한 달에 두 번만 나오셔도 저희는
정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우스이 상이 직접 와서 복직을 원했을 때는
협회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미루어 짐작이 되지만
그냥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어서
시간적 여유가 나지 않을 것 같다고
재차 내 입장을 설명 드렸다.
내 얘기가 끝나자 그녀는 협회에 돌아가서
내 뜻을 그대로 전달하겠다고 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는 서점에 잠시 들러
일러스트 관련 잡지들을 둘러봤다.
나는 우스이 상에게 그만둔 이유를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협회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서였다.
내가 재직해 있던 곳은 비영리단체로
봉사와 헌신이 기본자세로
장착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내가 담당했던 부서는 전국 각지에서 온
보란티어를 관리하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봉사교육을 받고 또 현장에서
실습을 해가며 익혀가기도 했다.
임상미술사로서 나는 미술 수업에
많이 참여를 했고 지도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수업을 만들어가곤 했다.
우리가 일하는 긍극적인 목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낮추기 위한 노력을 항상 필요로 했고
장애인 분들에게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즐거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각종 프로그램을 짜내고 그것들을
함께 체험하며 옆에서
서포트해주는 역할이 컸다.
생각보다 손길이 필요한 곳이 상당히
많아서 늘 바빴던 것 같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처음 가졌던
사명감 같은 건 점차적으로 엷어져 가고
그저 월급쟁이로 전략해 출근하고 퇴근하기를
반복하고 기계적인 업무를 치리는 하루가
쌓여갔던 것 같다.
나도 분명 그랬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도
나와 같은 딜레마에 빠졌던 시기였었다.
바쁜 와중에도 잠시 짬을 내서 잠깐씩
봉사를 하고 가시는 분이 많은 가운데
봉사라는 이름을 하고 나와서는
요리교시에서 배운 쿠키를 만들어 가져와
커피를 마시며 하루종일 수다만 떠는
자칭 모 기업 사모님을 보면서,,
자기는 00 단체, 00 협회에서 몇 년째
봉사활동을 하고 다닌다고 입으로만
일하시는 체육 교사를 보면서,,
장애인 부모가 즐겁게 웃는 걸 보고
장애아를 둔 부모가 저렇게 편하게
웃음이 나오는지 신기하다며
나한테 그렇지 않냐고 동의를 구하는
전직 간호사를 보면서,,,
봉사를 마치고 나면 집이 멀다며
차비를 좀 보태 줄 수 있냐고
매번 물으시는 약사님을 보면서..
출석할 때마다 장애 아동은 어차피
잘 모르니까 그냥 간단하게 하고
끝내자는 카레집 사장님을 보면서,,
나를 되돌아 봤다.
나도 저들과 별 반 차이가 없지 않을까,,,,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데 내성이 생기다보니 은연중에
내가 도와주고 있는 위치에 서 있음이
교만해지고 마음을 다하지 못했다.
자원봉사자는 내 스스로 해야 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인과 공익을 위해야 하며
지속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
입사 동기는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나보다 2년 빠르게 협회를 떠났다.
봉사, 보란티어,, 참 괜찮은 단어이고
누구나가 한 번쯤 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누군가를 위해
댓가없이 몸과 마음을 쓰고 내 시간과 땀을
쏟는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직접 해보면 알 수가 있다.
그래서 하다 보면 본연의 자신 모습이 나오고
불쑥 튀어 나오기도 하고 자기가
베푼 만큼 받고 싶은 본능을 들어낸다.
봉사란 기본적으로 무형적인 이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자기만족과 보람을 위한 봉사인데
그게 배제되면 진정한 봉사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모든 걸 내려놓은
지금에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착각과 오만들을
모두 버리고 떨쳐내고 있는 중이다.
24살, 보란티어라는 걸 처음 체험하면서
느꼈던 순수한 열정과
진심 된 마음이 다시 채워져갈 때
그들과 또 함께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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