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축하 문자를 받고서야
내 생일임을 알았다.
[ 깨달음, 오늘 내 생일이래 ]
[ 그래? ]
출근하려고 넥타이를 매고 있던 깨달음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9월에 크루즈에서 양력으로 생일파티를
치뤄서 음력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후 미팅을 끝내고 들어와
저녁준비를 위해 양상추를 씻고 있는데
깨달음이 나오라는 전화가 왔다.
[ 거기? 너무 먼데.. 그냥 집에서 먹자...]
[ 당신 생일이라고 하니까 점장이 일부러
자리 만들어 줬어 ]
우리집에서 거리상으로 보면 그다지 멀지 않지만
전철을 두번이나 갈아타야 한다는 게 귀찮았다.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먼저 들어가
기다릴 테니 천천히 준비해서 나오란다.
눈썹을 얇게 그리고 립클로스를 발랐다.
매일 출근하는 직장을 그만둔 후로는
원래부터 잘 하지 않았던 화장을 아예 안 하고
살아서인지 눈썹 그리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깨달음은 벌써 혼자서 와인을
반정도 비운 상태였다.
[ 깨달음,,,지난번에 생일파티 했잖아 ]
[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 그렇잖아 ]
내 잔에 와인을 따라주며
생일 축하해라며 속삭였다.
[ 고마워..]
점장님이 내가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는
음식을 빠르게 내 주셨다.
우린 마치 부부싸움을 막 끝내고 나온
사람들처럼 아무 말 없이
음식에 열중했다.
침묵을 깨는 [ 맛있다 ]라는 단어가
허공에 떠돌며 둥실 거리는 것만 같았다.
가게 분위기도 조용하고 클래식해서인지
우리의 침묵이 그렇게 어색하진 않았지만
예의상하는 말이 아닌, 정말 맛있어서
하는 말들이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 깨달음,, 그 여직원은 어떻게 됐어? ]
[ 음, 유전적인 걸 확인하기 위해 이번주에
부모님들도 도쿄로 와서 정밀검사를
하기로 했대. 그래야
난치병신청을 할 수 있다네 ]
[ 그렇구나...]
깨달음이 약 2주간 고생한 덕분에 그녀가
맡았던 일들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벌써 회사 연말정산을 하기 시작했다며 내게도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라면서 1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것 같다고 요즘
부쩍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고 했다.
다시 침묵이 흘렀는데
불쑥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 내년에는 우리 삶의 방식이 바뀌겠지? ]
[ 모르지.. 바뀔지.. 아님 그대로일지..]
[ 기대되지 않아? ]
[ 기대 돼.. 빨리 내년이 왔으면 좋겠어
맨날 여행이나 다니게...]
깨달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취미는
여행이다. 대학 때부터 배낭여행을 자주
했었고 지금도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싶어 한다.
우린 지난달, 세계일주 크루즈 세미나를 다녀왔었다.
그다음 주부터 당장 출발하는 선박이 의외로
많았고 비용도 생각만큼 비싸진 않았지만
깨달음이 약간 망설였었다.
[ 그날, 세미나 나와서 커피 마시면서
내가 슬기로운 노후생활을 어떻게 하면
정말 좋을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당신이
홀로서기를 잘해야 한다고 했잖아 ]
그랬다. 늙으면 늙을수록 홀로서기를
잘해야 한다고 분명 말했다.
나이 들수록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내 몸과 내 앞가림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말을 했었다.
[ 그 말이 서운 했어? ]
[ 아니.. 서운한 게 아니라,, 난 정말
홀로서기를 잘할 수 있을까 싶어서..]
내가 강조했던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건강적으로 홀로 설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자기는 원래
혼자를 싫어해서인지 자신이 서질 않았단다.
자신이 눈 감는 순간까지 늘 내가 옆에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깨달음.
[ 있어.. 있는데 사람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까
홀로서기 연습도 항상 하라는 거지,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아까 말한
4가지 것을 준비하는 게 좋다는 거야.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부부도 결국엔 각자도생이잖아 ]
각자도생이 뭐가 부부냐,
부부는 원래 그러면 안 된다
그럴 것 같으면 왜 결혼을 하고 사냐,
나이 들면 들수록 부부가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슬기로운 노후생활은 따라
각자 알아서 사는 게 아니라 둘이서
죽는 날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슬기로운 것이다. 등등 각자도생이라는
단어를 민감하게 받아 들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슬기로운 노후생활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알았다고 당신 생각을 존중하겠다고 했더니
요즘 자기 가을 타는 것 같다며
슬프단다.
[ ........................ ]
깨달음 가슴엔 단풍이 들고 있는 모양이다.
슬기로운 노후생활을 위해 정말 슬기롭게
준비하며 마음을 다져갔으면 좋겠는데
저렇게 여린 마음으로
노년을 어찌 보낼지 심히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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