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달음, 저녁은 뭐 먹을 거야? ]
[ 당신 몇 시에 약속이라고 했지? ]
[ 5시, 4시 반에는 나가야 돼 ]
뭘 먹을지 약간 고민을 하는 것 같더니
라면을 먹겠다고 했다.
[ 라면만 있으면 돼? ]
[ 응, 근데 그 냄비에 끓여줘 ]
[ 알았어 ]
예전부터 깨달음이 사고 싶어 했던 라면 전용?
양은냄비를 블로그 이웃님이 보내주셨다.
집에 냄비가 많은 것도 있고 양은냄비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어 사지 않았는데 깨달음이
한국 식당에 가면 양은냄비에 나오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면서 항변을 하길래
라면 전용 냄비로 사용하기로 했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모아 김밥도 한 줄 말아
라면정식을 차려주고 미안하다는 말을
다시 하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문화의 날로 공휴일이어서 깨달음과
영화를 한 편 볼 예정이었는데 오늘만 시간이
된다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깨달음에게 양해를 구했다.
샤브샤브 집에 도착해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사진을 몇 장 찍어도
되겠냐고 했더니 흔쾌히 오케이를 해주셨다.
블로그를 10년 가까이하고 있다고 하니까
요즘은 틱톡이나 유튜브가 인기이니까 그걸
시작하라면서 출판일을 하시는 그녀답게
유행하는 콘텐츠를 몇 가지 알려주셨다.
[ 근데, 남편분에게 죄송하네. 휴일인데 내가
시간을 뺏어서..]
[ 아니에요, 전혀,, 괜찮아요 ]
음식이 나올 때마다 대화가 잠깐씩
끊어졌지만 코로나, 요리 레시피 얘기를
하면서 분위기가 차츰차츰 편해져 갔다.
모 자살방지협회에서 알게 된 그녀는
나를 만나면 왠지 모르게 자신을 꾸미지 않게
된다며 항상 같은 질문을 했었다.
깨달음이 잘해주는지, 착한지,
성품은 어떤지 등에 관심이 많았고
오늘도 그녀의 질문은 똑같았다.
[ 저희는 각자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부부라고나 할까..제가 결혼생활이
좀 안 맞은 거뿐이지, 깨달음은 극히
평범하고 착한 사람이에요 ]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던 그녀가 자신은 너무도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며
지금도 끊임없이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했다.
그녀의 깊은 속사정은 블로그에 모두
기재할 수없지만 그 원인은 남편에게 있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상태와 변함이
없는 게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 아드님이 계시는 미국에 잠깐 다녀오시는 건
어떠세요? ]
[ 가고 싶은데 코로나 때문에 못 갔지...
그래서 더 내가 정신적으로 힘든 것 같아 ]
그녀는 결혼생활 26년 동안 가면부부로
살았다고 한다. 남편이 교육자인 것도 있고 해서
참아오며 두 얼굴로 살아오다 보니 자꾸만
정체성을 잃게 되고 내년이면 남편이 정년퇴직을
하는데 벌써부터 숨이 막혀온다고 했다.
[ 나이를 더 먹으면 손버릇이 없어질까?
학교에서는 학생들한테 존경받는다는데
집에서는,,, 폭군이었어...]
나지막이 읊조리듯 뱉어내는 그녀의 말에
난 대답을 하지 않고 두 눈을 응시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했던 건 자신의 넋두리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https://keijapan.tistory.com/1380
그녀는 자기가 왜 내 앞에서 이런 말을
숨김없이 하는 줄 아냐고 물으면서
언젠가 내가 정신과를 다닌 적 있다고
털어놓으면서 내게 맞는 의사를 찾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게 참 용감하게 보였단다
[ 난 숨기고 싶었거든.... 근데 케이 상은
진짜 솔직하더라..]
[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만 꼭 감출 이유도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저는 말을 했어요 ]
[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와 같다고 했잖아,
케이 상이.. 근데.. 내 감기는 독감인지
너무 오래가는 거 같아, 아픈 시간이
길어서일까...]
https://keijapan.tistory.com/1103
지금껏 그녀가 남편과 어떤 결혼생활을
보냈는지 지난번에 대충 알고 있던 것보다
오늘은 상당히 짙고 심각한 얘기들이 많았다.
한여름에도 반팔을 입지 못했고
마스크를 365일 벗지 못했던 이유,
아들을 미국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사건 등,,
지금껏 가면부부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이젠 버려버리고 새로운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했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더니
스쿠버다이빙 자격증도 따고 싶고
아들이랑 해외여행도 다니고 싶고
애완견을 좋아해서 애완견 미용도
배워보고 싶단다.
아들이 자신을 버틸 수 있게 붙잡아 줬다며
눈물이 글썽거렸다.
https://keijapan.tistory.com/1426
오늘 나를 만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결단에 잘했다고, 잘하고 있다고
누군가 자기편에 서서 다독여주면
큰 힘이 될 것 같아서라고 했다.
불쑥불쑥 침울함에 빠져 자살을
떠올릴 때가 있지만 정말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거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고 했다.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니
남편분과는 거리적, 환경적으로 변화를
조금씩 주는 연습을 해보시라고 했더니
거처를 옮길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한다.
https://keijapan.tistory.com/1179
우린 디저트를 먹으며 앞으로 남은 절차들을
얘기하면서 그 과정에서 힘든 문제들이
발생했을 시 언제든지 도움이 되겠다는
약속을 드렸다.
역에서 헤어지는데 그녀가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우리 집으로 한 번 놀러
오시라고 했더니 진짜 가도 되냐면서
너무 좋아한다.
플랫폼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사람이 무너지는 것은 단 한 번의 사건에서
오는 게 아닌, 축척되고 축척된 상처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해 터지고 피를 토해내는 것라는 걸
다시 알게 되었다. 살고 싶어 버둥거리는
모든 소리에 좀 더 귀기울리며 그녀의
몸과 마음에 딱지가 아물어질 때까지
그녀의 편에 서서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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