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자식들이 모이고
손녀와 증손자가 응원한 덕분에
일주일을 더 견디셨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발신자가 서방님 이름이 뜬 핸드폰 화면을
내게 내밀며 전화를 받던 깨달음이
메모지에 8시 41분이라고 적었다. 서방님은
교토에서 요양원으로 향하는 길이라며
사망신고서를 받는 것부터 앞으로 해야 할
절차에 관한 얘기가 오가는 동안
나는 신칸센을 예약했다.
2시간 동안 달리는 신칸센 안에서도
또 두 시간을 더 타고 간 버스 안에서도
깨달음은 잠을 자지 않았다.
무슨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아무 생각이 없다고 했다.
울진 않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무거운 침묵이
깨달음을 감싸고 있었다.
회관이라 불리는 곳에 안치되어 있던
어머님은 다다미방에 누워계셨다.
서방님과 깨달음이 번갈아 향을 피우고
조용히 합장을 하고 나서는
얼굴에 쓰인 실크천을 걷어올려
어머님 얼굴이 편안하다며 마지막은
고통스럽지 않으셨던 것 같다는 말을 나눴다.
난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영화 오쿠리비토(おくりびと)에서 나온
몇몇 신을 떠올렸다.
우리 아빠의 장례식 이외에 처음으로 보는
일본식 장례 스타일이 낯설고 진한 향 냄새가
뇌 속 깊이 스며들어 정신이 혼미해왔다.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워낙 시골이다 보니 뭐가 잘 안 맞는다며
서방님이 깨달음에게 보고하듯이
하나씩 설명했다.
다음날 스케줄을 함께 확인하고 우린
그곳에서 가까운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어머님 장례식이 시작됐다.
예쁜 옷과 꽃장식을 하고 난 후 입관이 끝나자
스님이 오셔서 고인의 마지막을
추도하는 염불과 법문 같은 걸 하셨다.
크리스천인 나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못 알아들었지만 극락왕생과
남은 자식들을 염원하는 뜻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화장이 끝나자 유골을 가지고 깨달음의
조상님들을 대대로 모시고 계시는
절에서 다시 마지막 범문을 듣고
어머님을 넣어드렸다.
깨달음은 마지막까지 의연한 모습으로
어머님을 보내드렸습니다.
내가 눈물을 보일 때마다 말없이 어깨를
토닥였고 정작 본인은 쿨하게 어머님과
작별을 했습니다.
너무 덤덤한 모습이 더 아프게 다가왔지만
그것 또한 깨달음만의 이별 방식이라
생각하고 전 조용히 마음고생이 덜 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염려해주시고 함께 마음
써주신 덕분에 화창한 봄날 어머님을
편히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저희에게
시간을 좀 더 주시면
다음 소식 또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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