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273 이번 생은 망했을지 몰라도 옛 동료를 만났다. 동료이면서 동기인 그녀는 여전히 차분했다. 정기적이진 않지만 가끔씩 메일로 서로의 안부와 생사를 물어와서인지 3년 만의 만남인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술을 썩 즐기지 않은 그녀가 오늘은 이자카야에서 보자고 하는 건 뭔가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코로나 얘기를 시작으로 요즘 가장 핫한 월드컵 얘기까지 두서없는 대화가 오갔다. [ 정 상, 한국 다녀왔어? ] [ 응, 코로나로 못 가다가 10월에 다녀왔어 ] [ 그랬구나, 아,,남편분도 잘 계시지? ] [ 응, 잘 있어 ] 그녀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잠시 소개를 하고는 동기들 소식 전했다. 협회지를 보고 이미 다 알고 있는 동기들 근황을 난 굳이 듣고 싶지 않았다. 누가 교수가 되고 누가 어디로 전직을 했는지 나와.. 2022. 12. 2. 어제와는 너무도 다른 오늘이 있다 노트북 위에 노란 봉투가 놓여있었다. 늘 같은 봉투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분 뿐이기에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깨달음 회사 담당 세무사(税理士)인 노야마(野山)상이 보내온 것이다. 깨달음이 회사를 창립하고부터 지금까지 세무 일을 맡아주시고 우리 부부의 자산관리까지 해주셨기 때문에 어찌 보면 속속들이 속사정을 잘 알고 계신 분이다. [ 깨달음, 노야마 상, 이번에도 아무 연락 없이 잠수 탔었어? ] [ 응, 늘 그러니까.. 또 입원을 한 건지.. 근데 이렇게 사과편지 보낸 거 보면 아직까진 괜찮다는 소리겠지 ] [ 난치병이라고 그랬지? ] [ 응,,] 나와도 몇 번 식사를 한 적이 있던 노야마 상. 지병이 악화되기 시작되던 3년 전부터 일처리가 미뤄질 때마다 사과하는 마음에서 편지와 상품권을 보내셨다. .. 2022. 11. 16. 시아버지를 떠올리던 날 세탁기를 돌려놓고 난 냉장고를 정리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김치를 김치냉장고에 나눠 넣어두려고 소분을 하는 중이었다. 초인종 소리와 함께 배달원이 내게 건넨 흰 상자엔 깨달음 이름이 적혀있었고 그 바로 위에는 우체국 주소가 적혀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마지막 날을 아쉬워하며 보내던 날, 같은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매일 2번씩 왔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전화를 걸었더니 우체국 직원이었다. 시부모님이 요양원에 들어가셨을 때, 우린 두 분이 제철 먹거리를 드실 수 있도록 후루사토카이(ふるさと会)에 신청을 했었다. 지역 특산물인 과일이나 생선, 도시락까지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이 많아 두 분이 매달 받아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번 달, 아버님 요양원에서 배달을 갔다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돼서 어떻게 하면 좋.. 2022. 10. 22. 한국의 가족과 3년만에 만난 남편 김포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타려는데 깨달음이 지하철을 타고 싶다고 했다. 3년의 공백이 있었으니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도 구경? 하고 오랜만에 한국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30분이 넘도록 5호선을 타고 오는 길에 오고 내리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깨달음이 한국사람들도 일본처럼 좌석 가장자리를 앉으려고 한다고 자리가 비면 다들 거기로 옮겨간다며 예전에는 못 봤던 풍경이란다. [ 아니야, 10년 전에도 그랬어 ] [ 그래? 난 왜 못 느꼈지...]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깨달음은 바로 리모컨을 들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프로를 찾았다. 가족들과의 약속시간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갈 수 있다고 했더니 된장찌개 먹으러 가자고 했다. 한국에 오면 제일 먼저 그 집 된장찌개를 먹.. 2022. 10. 13. 아버님,,너무 죄송합니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양귀비가 좋아했다는 비파 열매는 귀족 열매 또는 황금 열매로 불리는 아열대 과일이다. 5,6월에 열리는 비파는 냉장보관을 해도 대략 3일이면 상하고 만다. 비파의 효능으로는 간, 호흡기 질환에 좋고, 두뇌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아버님이 비와(びわ)를 먹고 싶다고 하셔서 대형마트는 물론 동네 과일집까지 샅샅이 뒤져 봤지만 모두가 철이 지난 과일이라 지금은 구매하기 힘들거라 했다. 어쩔 수 없이 통조림으로 주문해 바로 보내드렸다. 어제부터 하루 종일 책상에서 도면 체크를 하느라 분주했던 깨달음은 남동생의 전화를 받고 굳은 것처럼 비동조차 하지 않았다. 서방님이 요양원에 도착하고 난 후에 어떤 상황이였는지 상세히 묻고 또 물었다. 일본 시아버지의 부탁을 들으며 지난 화요일, 시아버님이 폐렴과.. 2022. 8. 22. 모두가 그렇게 산다 뜬금없이 이곳에 온 이유는 특별히 없었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걷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이곳에 와 있다. 집에 있는 수조 앞에서도 멍하니 30분 이상은 거뜬히 앉아있는 버릇이 있어서인지 살아 숨 쉬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생물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머릿속이 차분해지곤 한다. 꼭 이곳이여야했던 것도 없이 단지 수족관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관내는 생각보다 훨씬 낙후? 된 느낌이지만 여러 생물들만 볼 수 있다면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돌고래쇼 앞에는 꼬맹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박수를 치고 있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의 모습을 사진에 담느라 정작 돌고래는 뒷전이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사색하기 딱 좋은 날,, 불어오는 바람결에 실구름들이 유유히 움직이고 있다. 쥐치처럼 생기기도 하고 복어를 닮은 녀석이 주둥이를 .. 2022. 5. 16. 이 블로그가 존재하는 이유 작년, 이웃님들에게 연하장을 마지막으로 드린 데는 내 나름 이유가 있었다. 10년이 넘게 블로그를 하다 보면 권태기도 물론 찾아오지만 나는 그것보다 이 블로그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의문을 가진지 꽤 오래됐다. 과연 누구를 위해 글을 올리는 것인가... 불특정 다수의 그 누군가를 위해 난 온전한 내 시간 2,3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광고수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유튜브로 화제성이나 자극적인 내용들을 찍어 올리면 수익이 나올 것이다. 그럼, 이 블로그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남편이 일본인입니다만 잊고 있었던 건 아니였다. 어제 한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고 우두커니 앉아 많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 부부의 얘기가 담긴 책.. 2022. 4. 4. 중년도 청춘만큼 아프다 지난해를 끝으로 맡고 있던 협회직을 그만뒀다. 특별히 정리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어서 깨달음은 말렸지만 난 그냥 놓고 싶었다. 그래도 여전히 내 도움을 필요로 할 때면 오늘처럼 아침부터 업무를 동행하곤 한다. 같은 단체에 속해 있다 보니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요령이 생기고 나면 더 이상 내 도움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늦은 점심시간 커피숍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눈을 감았다. 시간적으로 꽤나 여유로워질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남아 어떻게 활용해야 잘하는 건지 연구 중인데 아직 적절한 그 무엇?을 찾지 못했다. 왜 갑자기 협회를 그만두는 건지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궁금증만 증폭시켜놓고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2020년, 도쿄올림픽이 끝나면 .. 2022. 3. 3. 해외거주자,,,,보이스피싱 오후 일정을 급히 취소하고 대사관으로 가는 내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서울에 사둔 아파트가 여러모로 사람을 귀찮게 하고 있다. 조합원들 사이에 무슨 이권다툼이 있는지 통합이 안 되고.. 자꾸 서류 보낼 일을 만든다. 이럴 때마다 내가 한국에 없으니 가족들이 내 일을 대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 숨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신경쓰이게 하는 아파트라면 그냥 팔아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데 깨달음이 완강히 반대를 하고 있다. 아무튼,, 내 일을 남에게 부탁해야 하는 지금의 내 상황이 진짜 싫다. 그래도 지금 당장 갈 수 없으니 서류를 보내야 하고.. 그래서 스트레스가 또 최고치를 치솟고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인지 오늘만 그런 건지 사람들이 많다. 잠시 의자에 앉아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 하나씩 구비서류를 작성.. 2022. 2. 17. 일본어,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작년 여름, 골절상을 입을 때부터 병원을 다닐 때면 택시를 타는 버릇이 생겼다. 쉬엄쉬엄 운동삼아 걸어도 되는 거리이지만 깨달음과 둘이면 전철보다 택시를 타는 게 교통비는 물론 여러모로 효율적이다. 검사 결과만 듣고 나오면 되는데 깨달음은 동행하길 원했다. 로비에 들어서면 항상 두번씩 재던 혈압을 오늘은 자신의 혈압이 높다는 걸 인정하는지 한 번으로 끝냈다. 대기실 티브이에선 코로나 감염자가 9만명을 넘어갔고 이번주내로 곧 10만으로 늘어날거라 예상되는데 어떤 대책이 현명한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내 검사 결과는 아주 짧고 심플했다. 3개월에 한 번씩 받는 갑상선 호르몬은 별 문제없었고, 4년 전 자궁근종 수술한 부위에 또 뭔가가 생긴 것 같다고 했던 산부인과에서도 수술을 요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2022. 2. 3. 가끔은 남사친이 더 편할 때가 있다 류(劉)상을 만나러 요코하마(横浜) 차이나타운을 찾았다. 작년부터 만나자고 했던 약속이었는데 코로나로 몇 번 미뤘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뤘다간 두 번 다시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런치타임에 잠깐 시간을 냈다. 요코하마가 삶의 터전인 류가 도쿄까지 나오는 것보다 내가 이동하는 게 빠를 것 같아 움직였는데 류가 역 앞에 나와 있었다. 적당히 배가 나온 40대 후반이 된 류는 도수 높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머쓱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너무 반가워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더니 류가 쑥스러운 듯이 악수를 했다. 얼굴이 변했네, 늙었네, 살이 쪘네, 중년 아줌마네 등등 서로 약간씩 디스를 해가며 예약해 둔 식당으로 걸었다. 대학원 동기인 류는 중국인으로 졸업하고 바로 이곳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에서 디자인 사무.. 2022. 1. 13. 아침 밥상이 서로 다른 이유 [ 케이야,, 너 요즘 많이 바빠?] [ 아니..별로 안 바빠 ] [ 근데 왜 자꾸 입술에 물집이 생기는 거야? 뭐가 그렇게 스트레스야 ? 정말 잘 먹고 다니는 거야? ] [ 잘 먹고 있어...] [ 니가 청국장 먹고 싶다고 할 때마다 내가 짠해 죽겠다.. 보내 줄 수도 없고,,] 블로그에 병원 간 얘길 올리면 어김없이 가족, 지인들이 우려의 목소리로 전화를 한다. [ 뭐 좀 보내줄까? ] [ 아니야,,여기도 다 있어 ] [ 근데..뭐가 그렇게 널 힘들게 하는데... 말 좀 해 봐,,한국에 올 수도 없고,,] 친구는 끈질지게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저녁까지 뭘 먹고 다니는지 청국장이든 뭐든 어떻게든 보내볼 테니 뭐든지 말하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난 매일 미역국을 먹는다. 산모도 아닌데 벌써 일주일째.. 2021. 12. 24. 감사는 감사로 표현하는 것 2주전,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연어가 한 마리 날아왔다. 홋카이도가 고향이 아이(愛) 짱이 보내온 것이다. 나와 전공은 달랐지만 연구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친하게 되었고 그녀는 졸업을 하고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작가활동을 하면서 1년에 한두번은 전시회나 세미나 참석을 위해 도쿄를 찾았다. 내가 연어구이를 좋아한다는 걸 기억하고 가끔 이렇게 아무 소식이 없다가 한 마리씩 보내온다. 얼굴 한 번 보자고 했더니 마침 일이 있어 겸사겸사 도쿄에 올 일이 생겼다길래 식사 약속을 했다. [ 왜 이 레스토랑에서 만나자고 그런 거야? 내가 그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 [ 케이 짱 집하고 가깝고 나도 이 근처에서 볼 일이 있어서 여기가 제일 편할 것 같아서 ] 코로나 전에 만나고 이제 보니 벌써 횟수로 3년이 지났다며 그간.. 2021. 12. 8. 마지막 나눔이 될 것 같아요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아마존에서 맥주가 배달되었다. 발송인이 적혀있지 않아 도대체 누구인지 내 지인과 깨달음 지인들을 찾다가 못 찾고 송장번호로 아마존 홈피를 검색하는데 깨달음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 같더니 알아냈다며 나카무라 (中村)라고 했다. 지난달 내가 김치를 담아 친구들과 지인에게 나눔을 하고 난 뒤, 뒤늦게 깨달음이 혼자인 친구에게도 보내고 싶다고 하길래 월요일날 한국 김과 함께 챙겨 보냈던 분인 나카무라 상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오사카(大阪)에 살고 있고 홀로 도쿄에서 지내는 기러기 아빠인데 깨달음보다 5살이나 어리지만 혼자 산지 20년이 넘어서인지 정말 늙어 보인다며 만날 때마다 짠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 당신에게 너무 고맙다면서 해외여행 못 가니까 각국의 맥주를 보낸 거래 ] .. 2021. 11. 11. 그래서 결혼을 했다. 빗줄기가 오락가락 갈피를 못 잡고 흩날리는 오후, 우린 신주쿠역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천천히 걸어가면 갈 수있는 거리였지만 갑자기 기온이 뚝하고 떨어진 탓에 찬바람이 매서웠다. 로비에 들어서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니 그 날의 기억들이 고스란이 떠오르면서 왠지 설레었다. 간단히 축하주만 한 잔씩 하고 나올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괜찮아 코스를 부탁했다. [ 왜 우리가 여길 그동안 안 왔지? ] [ 음,, 이쪽으로 올 일이 거의 없었지 ] [ 근데 하나도 안 변했다.., 그날, 입구에 우리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 우리가 결혼식을 올렸던 호텔을 정확히 11년 만에 다시 찾았다. [ 축하합니다 ] 와인을 한 모금 하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깨달음도 생각이 많아졌는지 아무 말 없다. [ 깨달음.. 2021. 10. 28. 이전 1 2 3 4 5 6 ··· 19 다음